'건축물'이라는 단어를 Image 하나로 설명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 사례는 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되기에 국가, 대륙,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건축물의 Silhouette만으로 그 건축물을 인지시킬 수 있는 사례는 몇 개 없다. 건축물의 Silhouette만으로 그 건축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건 그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형태가 전세계의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유일무이하다는 걸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Egypt의 Pyramid, Paris의 Eiffel Tower, Dubai의 Burj Al Arab 그리고 Sydney Opera House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Eiffe Tower와 Sydney Opera House는 건립과정 자체가 논쟁의 역사였다. 2016년 3월 8일 Sydney Opera House가 완공 43주년을 맞았다.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형태의 건축물이 만들어지다.
1788년 Europe인들의 Sydney 정착이 시작된 뒤 Sydney에 Opera House라는 기능을 가진 공간이 최초로 생긴 시기는 1879년 이었다. 위치는 King st과 York st이 만나는 곳으로 이 시설은 1900년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이후 Opera House기능을 가진 공간은 Sydney Town Hall로 옮겨졌다. 하지만 Sydney Town Hall은 Opera House만을 위한 전용공간은 아니었기에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Opera House 전용 건축물을 짓자는 주장은 1940년대 후반, 당시 NSW State Conservatorium of Museum의 감독이었던 Eugene Goossens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Eugene Goossens은 단순한 제안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을 상대로 Lobby를 시작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부지로 Sydney CBD 북동쪽 끝점인 Bennelong Point(현재 부지)를 주장했다.
Eugene Goossens의 움직임이 결실을 맺은건 1954년으로 당시 NSW 주지사였던 Joseph Cahill이 그의 제안을 지지했다. Opera House 건설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다진 것이다. 그런데 Joseph Cahill이 Opera House 입지로 생각했던 부지는 Eugene Goossens와는 달랐다. Joseph Cahill은 CBD 북서쪽의 Wynyard Railway Station 부지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이 부지에는 Wynyard Park가 조성돼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1955년 5월 새로운 Opera House 건축 부지로 Bennelong Point가 최종 결정되면서 일단락 됐다. 당시 대지면적은 22,300㎡였다.
1956년 2월 Sydney라는 한 도시를 넘어 호주라는 국가를 대표할 만한 건축물을 세우자는 취지로 전세계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국제현상설계 공모가 열렸다. 12월 마감된 이 현상공모에는 총 28개국 233개 작품이 응모됐고 그 중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Le Corbusier, Frank Lloyd Wright, Alvar Alto, Mies van der Rohe, Philip Johnson 등도 참가했다. 1957년 네 명의 심사위원(Ingham Ashworth, Cobden Parkes, Sir Leslie Martin, Eero Saarinnen) 중 Eero Saarinnen을 제외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시작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어느정도 안을 추려놨을때 뒤늦게 Eero Saarinnen이 심사를 위해 Sydney로 날라왔다. 그런데 Eero Saarinnen의 지각(?)이 현재 Sydney Opera House가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Eero Saarinnen은 뒤늦게 참여했음에도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탈락시킨 안들을 다시 살펴봤다. 아마도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추려놓은 안들이 Eero Saarinnen의 맘에 안들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탈락된 작품을 뒤적이던 Eero Saarinnen은 'No.218' 작품을 주목하게 됐고 결국 Eero Saarinnen이 요구한 재심사를 통해 No.218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No.218은 Denmark 출신의 건축가 Jorn Utzon이 제출한 안이었다(위 Sketch).
심사결과는 파격이었다. 당시 Jorn Utzon이 38세였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안은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그린 Sketch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비록 18번의 현상설계에서 7번을 당선시킬 만큼 현상설계 자체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 중 어떤 안도 실현시킨 적은 없었다. 참고로 당시 현상설계 2등은 미국 건축가였던 J.Marzella(위 Image)였고 3등은 영국출신의 Boissevain and Osmond(아래 Image)였다. 당시 Utzon이 제출한 Sketch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돛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Utzon 자신은 Design Motive를 '고원'과 '구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선안이 발표되고 그해 6월 Jorn Utzon은 호주를 첫번째로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Model이 시청에 전시됐다. 홍보를 통한 시민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단 Sydney Opera House 건설을 위한 자금조달 목적이 더 강했다. 1958년에는 Sydney Oprera House 부지로 지정된 Bennelong Point에 있던 The Fort Macquarie Tram Depot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59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상못했던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크게 건축물이 놓여질 기단부를 건설하는 첫번째 단계, 건축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는 'Shell'이라 불리는 지붕을 짓는 두번째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부공사를 완성하는 세번째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물론 공사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졌지만 세 단계로 나누어 공사를 진행한다는 계획은 유지됐다. 기단부 공사가 시작됐음에도 Jorn Utzon은 최종안을 마무리 하지 못했다. NSW 주정부는 공사지연으로 늘어나는 예산과 그에 따라 커질 부정적 여론을 염려해 착공이 빨라지길 원했다. Utzon이 최종안을 마무리 짓지 못한 이유는 초기 그가 제안했던 설계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Sydney Opera House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지붕 형태를 만들어내는 Shell이 구조적으로 시공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래 Image를 보면 지붕이 마치 종잇장 처럼 얇은 하나의 면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저런 Shell형태의 지붕은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2년 동안의 재설계를 통해 Utzon은 2차원의 도면은 물론이고 3차원의 Model까지 제시하며 자신의 안을 설명했다. 'Yellow Book'이라 불렸던 책에는 지붕 Shell 구조의 전개과정과 Shell 곡면의 기하학적 규칙성, 굴곡진 수직유리벽의 역할 그리고 비계 없이 거푸집을 이용한 건설방법 등이 설명돼 있었다. 이때 Utzon은 잘라 놓은 Orange조각과 목욕탕에서 아들이 가지고 놀던 Beach Ball에서 구조적 해결의 Motive를 얻었다고 했다. 사실 건축구조 부분은 내가 완전 모르기 때문에 이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무리지만 대략 언급해 보면 Utzon의 해결방법은 사전에 제작된 Rib을 Cable을 사용해서 Arch로 만든후 이 Arch를 부채꼴로 펴서 Shell의 각 면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Rib과 Rib사이의 간격은 Ceramic Tile로 마감된 지붕으로 메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Arch를 만드는 Rib이 규격화 되지 않고 모두 다른 형태를 취해야 했고 이로 인해 공사비가 예산범위를 훨씬 초과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1961년에는 Opera House 설계 자체의 문제 외에도 운영상에서의 변화가 발생했다. 그 전까지 Opera House 현상설계를 비롯한 행정에 필요한 운영을 책임졌던 'Sydney Opera House Executive Committee'가 'The Sydney Opera House Trust'로 재편된 것이다. 그리고 이 Trust의 위원장을 NSW 주정부 산하의 Pubilc Work 장관이 1969년까지 겸임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 조항은 후에 Jorn Utzon이 Sydney Opera House 설계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배경이 됐다.
Sydney Opera House 두번째 단계 건설에 착수하다.
예정보다 2년이 지난 1963년 기단부가 완공됐다. 건설단계로 보면 첫번째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까지 투입된 공사비가 5,500,000AUD(2016년 한화기준 49.1억원)였다. 참고로 Sydney Opera House 시작 당시 예상했던 총 건설비가 7,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62억원)였다. 첫번째 단계가 완공 뒤 바로 두번째 단계인 지붕 Shell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Jorn Utzon은 자신의 사무실을 아예 Sydney로 옮겼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Shell(지붕)에 대한 구조적인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주 정부의 주력 Project가 아닌 개인 주택이라 하더라도 발주처와 설계자와의 관계는 틀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사기간의 연장은 비용의 증가를 수반하고 이는 발주처에게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발주처의 잦은 설계변경 요구도 문제였다. 이는 설계자에게 비용 증가로 직결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완만했던 발주처인 주정부와 Design Team간의 사이가 시간이 가면서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번에는 NSW주지사가 Robert Askin으로 바뀌었다(1965년). 당연히 산하 장관도 바뀌었다. 앞서 Sydney Opera House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던 The Sydney Opera House Trust의 위원장인 Public Work 장관도 Davis Hughes로 교체됐다. 발주처의 수장이 교체된 것이다. David Hughes는 그 동안 Project 참가 Team들의 의견과 작업을 전부 조율했던 Utzon의 권한을 자신에게 옮기려 했고 이런 Hughes의 방침에 Utzon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NSW의회에서 Opera House 건설에 초과되는 예산과 공사기간 연장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Jorn Utzon이 Sydney Opera House 외에 이렇다할 건축물 완공을 했던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이제 결과는 정해진 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건 Jorn Utzon이 Sydney Opera House 설계에서 손을 떼는 것이었다.
David Hughes는 Utzon에게 'Design Architect'라는 직위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감독권한이 전혀 없는 부차적인 역할로 오히려 Utzon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 아마도 David Hughes라는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Hughes는 다음에 Utzon이 취한 행동을 유도하려 그런 제안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Utzon이 취한 다음 행동은 호주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Utzon은 죽을때까지 다시는 Sydney, 아니 호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Utzon 사임과 관련해서 1,000여명의 시위자들이 주의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했다. 시위의 선두에는 Sydney Skyline을 만든 Modernism 건축가 Harry Seidler도 있었다. 뭐 이런 행동을 취하든 말든 David Hughes는 아랑곳 하지 않고 Jorn Utzon의 역할을 대신할 건축가를 임명했다. 그는 Design 부분에는 Peter Hall, 감독 부분에는 DS Littlemore, 시방서 부분에는 Lionel Todd 그리고 책임자로 EH Farmer를 임명했다. 두번째 단계 공사가 시작되고 4년 뒤, Utzon이 Sydney Opera House 설계에서 손을 뗀지 1년 뒤인 1967년, 2,194번째 Precast Shell 조각이 설치되면서 두번째 단계 공사가 일단락 됐다. 두번째 단계에 투입된 공사비는 약12,500,000AUD(2016년 한화기준 111억원)였다.
Jorn Utzon없이 세번째 단계 건설에 들어가다.
NSW 주 정부는 두번째 단계 완공과 동시에 세번째 단계 건설에 돌입했다. 세번재 단계는 건물의 내부를 채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공사비는 두번째 단계보다 훨씬 많은 56,500,000AUD(2016년 한화기준 504억원)가 투입됐다. 이 외에도 조명과 오르간 설치를 위해 9,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80억원)가 들어갔다. Jorn Utzon이 Sydney Opera House 건설에서 손을 뗀 또 다른 이유는 내부공사에서도 그의 의도가 묵살됐기 때문이다. Utzon이 담당했을때도 상황이 이랬는데 그가 현장을 떠난 뒤 만들어진 Sydney Opera House는 더이상 Utzon에게 자신의 작품이라 할 수 없었다.
우선, 시설을 Sydney Opera House라 하는 가장 큰 이유인 Opera Hall이 가장 큰 공간에서 작은 공간(Drama Theater)로 옮겨졌다. 그리고 애초 Opera Hall로 생각했던 공간은 Concert Hall로 용도 전환됐다. Utzon이 제안했을때 설계했던 부분도 당연히 변경됐다. 우선 건설경비 축소를 위해 Detail이 생략됐다. 변경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면 Sydney Opera House에서 굴곡진 목재 방음천장의 기본시험 Model이 취소됐다. 또한, Shell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유리벽의 굴곡 변형도 대폭 축소됐다. 이 부분은 Utzon이 심혈을 기울여 감각적으로 만들어낸 Detail이었다.
세번째 단계 건설에 들어간 뒤 6년이 지난 1973년 3월 8일 Sydney Opera House는 완공됐지만 공식 개관식은 같은해 10월 20일에 있었다. 이때 ElizabethⅡ까지 참석했었다. 최종적으로 건축물의 Dimension은 최고높이 67m, 길이 183m, 폭 118m였다. 공식 개관식 전 건축물이 일반에 공개된건 이보다 4개월 전인 그해 6월 Guided Tour가 실시되면서 부터였다. 최종적으로 현상공모를 시작한 1956년 부터 완공된 1973년까지 총 17년이 걸렸다. 1959년부터 시작된 공사기간만 따지면 14년이 걸린 셈이다. 이는 예정보다 10년을 초과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사비였다. 처음 예상한 공사비는 7,000,000AUD였다. 그런데 실제 들어간 비용은 102,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910억원)였다. 이는 물가상승분을 제외하더라도 처음 예상보다 15배가량 늘어난 금액이었다.
Sydney Opera House완공 뒤...
그런데 내 생각에는 Sydney Opera House가 전세계에서 현재의 지위와 인지도를 누리게 된데는 Sydney Opera House완공 뒤부터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사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1973년 이전 17년간의 건설과정은 설계자와 발주처간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그리고 비록 Opera House Project가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구조, 음향, 열관리, 무대설치 등 관련 전문가들을 대거 참여시킨 팀작업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라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설계자의 의도가 누더기처럼 반영된 상태에서 완공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과정을 두고 처음 설계자인 Utzon이 건축구조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지붕 마룻대에 결합되는 Shell들이 임의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거나 내외부 공간의 관계성을 빈약하게 설계했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계속되는 설계변경을 요구한 발주처의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Sydney Opera House가 'Design Competition의 역사와 대형 사업이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평가를 내리던 Sydney Opera House 건설과정이 진흙탕 싸움이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Jorn Utzon이 서로 엇갈린 Vault를 'Shell'이라 불렀던 이 구조물이 비록 직접적으로 물리적 측면에서 인과관계가 있다고 증명될 수 있더라도, 건축에서 기능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반 세기의 발전을 이룬 후, 현대 건축은 기능적인 측면 이외의 무엇을 원하고 있다. 순전히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표현에 대한 자율적 권리가 건물에서 다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중략)...
제3세대의 뛰어난 다른 건축가들처럼 Jorn Utzon 역시 두 가지 재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과거나 자연의 우주적인 요소와 직접 접촉하면서 산업 생산(특히, 조립화)이 가져다 준 현대적인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조립화'에서 순전히 기능적인 속성을 제거하고 유기적인 특성만을 부여한 것이다.
...(중략)...
Sydney Opera House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정부의 Amateur적인 오해 때문에 원래 건축주가 명시한 요구항목을 바탕으로 건축가가 의도한 것이 바뀌게 된 우리 시대 최초의 작품이 바로 Sydney Opera House이다. 이러한 현상은 건축 분야를 맹렬히 공격하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 건축가는 예술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거의 완성 단계에 와서 대작의 Program을 바꾸는 일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Space, Time and Architecture, Sigfried Giedion-
"The construction of the beautiful freestanding, sculptural tripartite Opera House was one of the longest contractual sagas of the century. Sadly, architect Jorn Utzon became the scapegoat of a scandalous political affair and in 1966 withdrew from his project. Sitting on Bennelong Point, virtually in the Harbour and overlooked by the great Sydney Harbour Bridge, the Opera House is completely exposed, as three-dimensional as the orange segments its forms are based on. It is all roofs with an imposing base. These were made possible by Ove Arup. Originally the winner of an international open competition in 1957, it was a scheme that broke most of the rules. It was finally completed in August 1973 by other hands under the direction of Peter Hall."
-Twentieth Century Architecture: a Visual History, Dennis Sharp-
이런 논쟁보다 내가 Sydney Opera House에서 주목하고 싶은건 완공 이후의 '관리'다. 그리고 분명 그 관리는 Sydney Opera House를 짓고자 했던 처음 의도와 처음 Site Positioning을 Bennelong Point로 결정하면서 생각했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함을 목표로 한다. Sydney Opera House에서 벌어진 첫번째 물리적 환경 변화는 전면광장과 폭 100m가 넘는 전면계단 조성이었다. 이 부분은 Jorn Utzon의 제안 당시 있었던 공간으로 그러나 완공 당시에는 실제 조성되지 못했다. 건축물 완공 당시 이 공간은 주차장으로 이용됐었다.
광장이 조성된 시기는 1986년으로 공식 개관식을 가진 뒤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였다. 당시 NSW 주정부는 전면광장과 함께 애초 Opera House의 Site Positioning을 정할 때 고려됐던, 인접한 Sydney Cove와 Farm Cove 그리고 Royal Botanic Gardens과의 연결을 구체화 했다. 이를 위해 주정부는 Waterfront를 따라 Promenade를 조성하고 이 공간의 활성화를 위해 Shop, Cafe 등을 기단부 아래에 만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설계 책임은 주정부 담당 건축가였던 Andrew Andersons과 Peter Hall. 건설 비용은 Opera House 지붕인 Shell을 만들때보다 두 배가량 더 많은 24,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214억원)를 예상했다.
1990년대 초반 Sydney Opera House Trust는 원 설계자인 Jorn Utzon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Utzon에게 향후 Opera House 설계 변경시 Project에 참여시키겠다는 보장을 한 것이다. 이는 Sydney Opera House를 중심으로 Hardware적인 면 뿐만 아니라 Software적인 면, 그 중에서도 Opera House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이다. 이는 한 도시를 넘어 한 국가의 Landmark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 Sydney Opera House라는 공간이 Good Place라고 생각하는 인식의 형성이 와드드한 건축물, 기이한 형태의 건축물 만으로는 형성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2년 'The Times'는 '현대 7대 불가사의 건축물'을 선정했는데 Sydney Opera House가 그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93년에는 지하주차장도 만들었다. 과거 주차장으로 사용됐던 공간이 전면광장이 되면서 필요해진 공간을 지하에 마련한 것이다. 1,1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40,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357억원)이상이 투입됐다. 1994년에는 Jorn Utzon의 원안을 소개하는 'Unseen Utzon'이라는 전시회도 개최했는데, 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취한 설계자 Jorn Utzon과의 관계회복의 일환이었다. 1997년에는 Sydney Opera House 변화를 체계적으로 수행할 Masterplan이 NSW 주정부에 의해 수립됐다. 그리고 수립된 안의 검토를 호주를 대표하는 건축가 Denton Corker Marshall이 맡았다. 1999년, Jorn Utzon은 Trust를 통해 향후 Opera House의 설계 변경시 역할을 할 Design Consultant로 임명되었다. 비록 Jorn Utzon은 호주에 오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Jan과 딸인 Lin은 Sydney Opera House와 Utzon을 꾸준히 연결해 주었다.
결국 Jorn Utzon도 Sydney Opera House의 덕을 봤다. 2003년 개장 30주년이 되는 해에 Jorn Utzon은 The Pritzker Prize를 수상했다. 2007년에는 Opera House가 UNESCO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1973년 세계 건축계에서 일었던 '누더기 건축'이라는 악평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Sydney Opera House는 글 처음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그 형태를 그리는 외곽선(Silhouette) 하나만으로 '건축물'이라는 명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더 큰 의미로 Sydney Opera House를 보다.
2004년에는 1973년 개장 이후 외관의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첫 번째 개조공사가 시작됐다. 그 공사 중에는 Jorn Utzon이 처음 설계했던 원안대로 Reception Hall을 개조하는 Project가 포함돼 있었는데, 그 공간에는 'The Utzon Room'이라는 명칭이 붙었다(투입비용은 69,300,000AUD로 2016년 한화기준 618억원). 그런데 이 개조공사에서 The Utzon Room 조성이나 Sydney Harbour Bridge가 바라다 보이는 서쪽 벽면 전체를 유리로 새롭게 단장하는 부분 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Opera House 서쪽을 Colonnade를 갖춘 Western Broadwalk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개조공사는 1986년 전면광장과 계단공간을 조성하면서 수립한 계획에 따른 실행으로 공사는 2009년 완공됐다.
"The present (theatre) Foyer is not giving you the feeling of being on the Bennelong Peninsula. The Harbour Bridge is marvellous yet you can’t see it. With a colonnade on the western side for protection, this will open up the entry to the Drama Theatre, The Studio and the Playhouse."
-Words from Jorn Utzon-
Western Broadwalk(위 사진)로 연결되는 Opera House의 기단부는 고급 유리로 마감된 Arcade가 조성됨으로서 기념품 Shop과 Sydney Harbour Bridge를 비롯해 Sydney CBD의 Skyline을 감상하며, Coffee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Cafe 및 Restaurant이 들어섰다. 그리고 Opera House 서쪽 벽면을 따라 길이 45m에 폭 5m 크기의 Waterfront Promenade가 조성됐다. 당시 NSW 주지사였던 Bob Carr는 이 공사를 위해 600,000,000AUD(2016년 한화기준 5,356억원)를 투입했다. 이 비용은 Sydney Opera House 건설을 위해 예상했던 비용보다 14배 많은 실제 투입된 비용에 6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래서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공사를 통해 Sydney는 Opera House 주변에 시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Waterfront 공간을 확보한다는 의미 보다 더 큰, Sydney Opera House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Royal Botanic Gardens과 서쪽 Sydney Cove를 연결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연결을 통한 Waterfront의 연장이라는 의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Sydney는 가운데 CBD를 두고 5시 방향에 있는 Hyde Park에서부터 The Domain -Royal Botanic Gardens -Sydney Cove -Sydney Harbour Bridge -Darling Harbour -Tumbalong Park가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Tumbalong Park와 Hyde Park의 연결고리는 World Square와 같은 재개발 Project들이 채워나가는 Liverpool st이 연결하고 있다. 이런 큰 틀에서 2004년 행해진 Western Broadwalk Project를 보면 지형적으로 툭 튀어나온 Bennelong Point에 있다는 Site Positioning의 약점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 Western Broadwalk Project 이전까지 Opera House 주변의 Openspace는 남쪽 전면광장과 계단공간 뿐이었고 앞서 언급한 CBD를 중심으로 Circle 형태로 감싸는 Openspace의 연결도 Opera House와는 어느정도 분리된 남쪽에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Western Broadwalk Project를 통해 그 연결 안으로 Opera House를 삽입시킬 수 있게 됐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Royal Botanic Gardens과 Sydney Cove를 연결하는 흐름이 Opera House를 끼고 북쪽(아래사진)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The Western Foyer services three performance spaces: the Playhouse, Drama Theater and the Studio. Utzon Architects in collaboration with Johnson Pilton Walker are currently working on the interiors of the Western Foyer. The design opens up the combined foyers with access and views to the Western Boardwalk and harbour.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building opened in 1973, patrons experience entering the Western Foyer theatres while always being oriented in the spectacular harbour setting of the Sydney Opera House."
- Johnson Pilton Walker's Homepage -
안타깝게도 Jorn Utzon은 2009년 완공된 Western Broadwalk Project를 보지 못하고 2008년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Jan Utzon이 Sydney 건축가 Johnson Pilton Walker와 함께 Project에 참여할 수 있었다. 2009년 Jan Utzon과 Lin은 Concert Hall에서 가진 Jorn Utzon의 추모식에 참석했다. Sydney 방문 두번째날 Guided Tour까지 참석하면서 둘러본 Sydney Opera House에서 내가 찾은 Issue는 건축물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최소한 내게 Utzon이 호주의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바다색과 대조되는 지붕색을 원해서 햇빛 반사를 고려해 선택한 Ceramic Tile은 Sweden에서 수입했다는 Guide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Tile 1,060,000장이 지붕을 마감하고 있다는 내용도 그렇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자세한 시설 규모도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Sydney Opera House in Sydney
냉정하게 얘기하면 Sydney에서 가장 큰 기대를 가졌던 Sydney Opera House는 건축물 자체만으로는 실망이었다. 하지만 이는 Sydney의 Landmark로서 Syndey Opera House를 봤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즉 Objet로 한 도시의 Landmark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봤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그보다 Sydney Opera House는 앞서 얘기했듯이 Sydney CBD를 둘러싸는 연속된 공공공간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 속에 하나가 되려는 노력으로 건축물을 읽을때 방문 하기전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Sydney Opera House 완공 10년 뒤에 처음 개관식을 갖은 '서초동 예술의 전당(1983)'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NSW 주 정부를 비롯한 공공이 Sydney Opera House 완공 뒤에 취한 전략은 단순한 Objet로서의 Landmark가 아닌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Landmark, 고립된 Ojbet가 아닌 도시의 Public Openspace에 연계된 장소가 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Software는 차치하더라도 Hardware적인 면만 보면 그들이 추구한 목표는 'Easy Access'였다. 완공후 36년이 지난 2009년 Sydney Opera House는 Sydney를 이루는 큰 틀 속에서 Landmark가 됐다. 시민들은 Opera House에 꼭 Opera를 보지 않더라도 가서 쉬고 Jogging course의 하나로 들른다. 동선의 목적지가 아니라 흐름의 중간이 된 것이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은 최초 완공된 1983년 뒤 10년 동안 부대시설 확충만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최초 완공 후 33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을 가려면 자동차나 남부터미널역에서 Shuttle Bus를 타야 한다. 공연을 보든 전시를 보든 뚜렷한 목적이 없으면 가지 않는 곳이 됐다. 그간 시민들의 Access를 위해 취한 행동도 시설 동쪽에 놓여진 Aqua Art 육교 설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민간개발을 통해 기부채납 받은 시설이지 공공이 설치한 시설은 아니었다. 이도 모자라 6년 전인 2009년 서울시는 '노들섬에 예술센터(일명 한강예술섬)'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지금은 그때 보다는 조금 더 합리적인 Process로 접근하고 있기는 하지만 'Easy Access'가능한 입지는 아니다.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이어 한강예술섬 Project를 보며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떠오르는건 여전히 공공문화시설을 Objet로서 도시의 Landmark로 보고 있다는 변하지 않는 고정관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