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은 김수근과 함께 대한민국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9살로 김중업이 더 많았다. 하지만 세상을 뜨는 순서는 없다고 김수근이 2년 먼저 타계했다(1986년). 5월 11일은 김중업 타계 28주년 되는 날이다. 흥미로운 건 현재 건축계에서 원로 건축가 대우를 받는 분들이 대부분 김수근 제자여서 그런지 김수근의 타계를 기념하는 행사는 종종 열리지만 김중업의 타계를 기념하는 행사는 거의 열리지 않는다. 하나 더 흥미로운 건 두 건축가가 설계한 많은 건축물들이 남아 있음에도 두 건축가를 기념하는 공간이나 두 건축가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없었다. 2007년 5월 28일 안양시는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대지면적 16,243㎡)를 매입해 김중업박물관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를 계기로 안양시내 김중업박물관은 건축가의 이름을 딴 국내 박물관으로는 '최초', 공공에서 건축가를 기념하는 상설 전시공간으로는 '최초'라는 Title을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안양시와 김중업이라는 Contents 사이에 형성된 관계는 이보다 훨씬 얇다.
사실 안양시와 김중업은 특별한 관계를 이룬 적이 없다. 김중업은 1922년에 평양에서 태어났고 1988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업실도 관훈동, 성북동, 장충동으로 모두 서울에 있었다. 김중업박물관으로 변모한 舊 유유산업 공장이 그의 초기작으로서 Le Corbusier에게서 건축을 배운 후 귀국해서 설계했다는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대표작은 아니다. 그의 초기대표작은 명보극장(1956)과 서강대학교 본관(1958, 위 사진)이 꼽힌다. 그렇다고 舊 유유산업 공장 대부분을 그가 설계한 것도 아니다. 그의 건축언어가 가장 잘 묻어 있는 건물은 현재 김중업관과 그 동쪽에 있는 문화누리관 정도다. 그 외 공장이 확장되는 단계에 그가 관여한 작업은 없다.
유유산업은 1957년에 연구소(現 김중업관) 설계를 김중업에게 맡겼다. 김중업은 Le Corbusier사무실에서 3년 10개월간 일하고 1956년 3월 귀국해서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차렸다. 그의 나이 34세때다. Le Corbusier사무실에 가기 전까지 그는 마쓰다(松田)-히라다(平田)건축사무소, 조선주택영단 기수,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 1947년 3월부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됐고 한국전쟁때는 한양공과대학, 이화여대, 숙명여대, 부산공업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즉, Le Corbusier 사무실에 가기 전까지 그가 설계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안양시가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를 Remodeling한 공간에 김중업 Contents를 끌어들인 이유는 있다. 첫 번째, 안양시는 2005년부터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를 지역특성화 사업으로 진행해 왔는데 이 사업의 공간적인 시작점이 안양예술공원(舊 안양유원지)이다. 그런데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가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있었다. 더군다나 유유산업은 2003년부터 제천일반산업단지로 본사공장을 이전하여 안양시 부지는 비어있었다. 안양시 입장에서는 비어있는 이 땅을 활용해 APAP와 연계된 용도로 개발하기를 원했다. 두 번째는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내 건물 중 일부를 김중업이 설계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건축'이라는 Contents를 APAP가 다루는 '예술'이라는 범위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마지막은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 Remodeling 이전에 근현대 산업시설을 재활용한 공간이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안양시는 이 흐름에 편승하고 싶었다. 안양시가 국내에서 따라갈 수 있는 좋은 선례로는 2002년 개장한 선유도공원(서안조경+조성룡 도시건축)과 2009년 개장한 인천 Art Platform(황순우&Vine건축)이 있었다.
안양시가 김중업박물관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한 그해(2007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유유산업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맡아 기본구상안을 수립했다. 그리고 2009년 박물관 조성을 위한 '안양복합문화관 Remodeling 현상설계'에서 박제유&JU건축안이 당선됐다. 당시 현상설계의 전제는 유유산업 공장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덧댄 일부만 철거하고 기존 건물 대부분은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JU건축은 당시 남아 있던 19개의 건물 중 연구소(김중업 작품)를 포함해 13동을 활용하는 복합문화공간 조성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Space Program은 기념관, 전시공간, 작가 Residence, Community Center, 공연장, 체험장, Studio 등이었다.
2012년 12월 개관을 목표로 진행됐던 JU건축의 설계안은 2010년 8월 유유산업부지 내에서 안양사(安養寺)의 유구가 발견되면서 급반전됐다(위 사진). 안양사는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사찰로 고려(918~1395)를 세운 태조 왕건이 통일신라시대 말인 900년, 이 지역을 정벌하러 가다 삼성산 자락에서 능정 스님을 만나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거기에 더해 안양사가 세워진 자리에는 그보다 73년 전인 827년에 중초사(中初寺)가 세워졌었다. 중초사가 유유산업부지 주변에 세워졌을 거란 추측은 입구에 있는 '중초사 당간지주(보물4호)'를 통해 할 수 있었다(아래사진 왼쪽). 1957년 유유산업이 이 부지에 공장을 조성할 당시에도 포도밭이기는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춧돌의 일부가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유물들은 한 쪽에 모아 놓고 일부는 유유산업 부지 내에서 전시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이었으니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안양사 유구가 발견되면서 안양시 입장은 꽤 복잡해 졌다. 안양사는 안양시 이름의 유래가 될 만큼 도시의 Origin이었고 무엇보다 900년에 창건된 안양사, 또 그 전 827년에 세워진 중초사라는 Contents는 솔직히 안양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직접 비교는 힘들지만 그래도 감을 잡기 위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유명한(?) 사찰 중 하나인 불국사의 건립시기를 말하자면 -여러 설이 있기는 하지만- 751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774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안양시는 설계를 중단하고 2011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시굴과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현상설계안에서 Open Space로 계획됐던 안양사지관과 문화누리관 사이 영역에서 남북 14m, 동서 41.4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의 흔적이 나왔다. 안양사의 강당으로 추정되는 흔적이었다. 강당의 흔적으로 사찰건축의 가장 본질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본당(안양사의 금당)의 터를 추정해 본 결과 김중업관 지하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혹자는 안양사의 규모를 고려했을때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려면 반경 1km내의 사유지를 모두 사들여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양시의 고민이 깊어졌다. 문화재라는 가치 기준으로 따지면 1000년 이상된 안양사, 그것도 금당의 유구와 60년도 안 된 김중업 설계의 건물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건물이 김중업이 설계하지 않았다라고 한다면 안양시는 고민도 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양사 금당 유구 발굴을 위해 김중업관을 허무는 순간 안양시가 본 부지를 매입해 끌어안고 싶었던 '건축'이라는 Contents는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안양사 금당의 흔적이 발굴된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봤을때는 추춧돌 몇 개일 뿐 큰 감흥은 없다.
안양시의 선택은 '양자택일'이 아닌 '일거양득'이었다. 원래 보존하기로 했던 13개동 중 김중업이 설계한 김중업관을 포함한 4개동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기로 결정했다(연면적 4,596㎡). 2013년 1월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이곳의 운영권을 넘겨 받고 2014년 3월 28일 개관했다. 한때 '안양천년문화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김중업박물관'이라는 이름 아래 김중업관, 문화누리관, 어울마당, 안양사지관으로 결정됐다. 우선 대지 서쪽,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김중업관(아래사진)은 우여곡절 끝에 '건축가의 이름을 딴 국내 최초의 박물관', '공공에서 건축가를 기념하는 최초의 상설 전시공간'이라는 Title을 지키게 됐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양시가 舊 유유산업 공장부지, 안양사터에서 선택한 '일거양득'에서 그 득(得)이 온전한 득이 아닌 어느 정도의 득이라면 이도저도 아닌 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유가 됐든 1000년 이상의 매장문화재 앞에서 아직은 문화재라는 인식 조차 없는 근현대 산업시설을 남겼다는 점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인식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어차피 김중업과 천년문화재라는 Contents에서 안양시가 온전하게 득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 Contents 외에 안양시가 득할 수 있었던게 또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도저도 아는 득은 다시 얘기하면 본 사업에서 함께 얻어낼 수 있었던 Contents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Contents는 그 산업시설을 짓고 사용한 유유제약이다. 유유제약은 1941년 유한무역주식회사로 시작했다. 창립자는 유특한 회장으로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의 막내 동생이다. 현재 건물 내에서 유유산업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은 3층 옥상으로 나가기 전 건물 벽에 Timeline으로 기록된 Text다. 안양사 유구가 발굴되면서 존치 건물의 수를 기존 13개 동에서 4개 동으로 줄였고 그 결과 유유산업의 흔적들을 담을 만한 공간이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문화누리관 1층에 있는 Cafe Interior를 서울 상수동에 있는 Anthracite처럼 Industrial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Contents는 땅이 가지고 있는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장소의 마련이다. 이런 장소로 가장 적당한 곳이 문화누리관 3층이다(위 사진). 일단 그곳에서는 김중업박물관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전경 중에는 안양사 유구도 포함된다(아래사진). 안양사 유구는 충감도 보다는 조감도 상에서 봐야 그 형태나 흔적 위에 얹혀져 있었을 사찰의 자리맺음을 상상하기 편하다. 문화누리관 3층이 그럴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다. 또한, 이곳에서 박물관 영역을 둘러싼 삼성산과 안양천 그리고 서쪽으로 전개되는 안양시 도시조직을 볼 수 있다.
내가 이곳에 갔을때는 개장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The Terrace'라는 Restaurant이 운영 중이다. 옥상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데 문득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때 이 공간이 주는 느낌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만하고 아직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비가 그렇게 많이 올때 이곳까지 올 일도 없지만은 무엇보다 그런 날에는 3층이라서 가뜩이나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 Restaurant이 왠지 문을 닫을 것 같았다. The Terrace에서 파는 음식의 종류도 그런 날씨와는 잘 안맞고. 종류를 바꿔보는 건 어떨까? Steak나 Italian Food도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 엄청 좋아함- 비오는날 생각나는 막걸리나 파전도 좋을 것 같고 바베큐와 같이 고기 구워먹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차피 The Terrace가 있는 이 건물이 문화재는 아니니 문화재에서 어떻게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느냐는 비판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