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평창동입니다.'
Drama에서 가정부가 수화기에 대고 했던 이 대사는 그 집 부유함의 척도를 드러내는 대사였다. 그래서 평창동은 잘 설계된 몇몇 Gallery와 전시시설이 있음에도 선뜻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기는 동네였다(물론 거리적인 요인도 크지만...). 그러다 몇 년 전 아내가 눈에 Heart 뿅뿅을 그려가며 보는 Drama를 흘깃 보다 왠지 낯익은 배경을 보게 됐다. Drama에서 차승원이 대사를 일갈하던 장면이었는데, 그 배경이 김종영미술관이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김종영미술관의 외부공간은 차승원 집의 외부공간이었다. Drama가 끝나고 그해 여름 Drama 배경 속에 아내를 넣어주겠다고 꼬셔서 김종영미술관으로 갔다.
김종영미술관이 들어선 대지(대지면적 1,116㎡)는 평창동이라는 지역이 갖는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동쪽 멀리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위 사진). 가까이에서는 김종영미술관 동쪽을 바로 지나는 계곡이 마지막으로 크게 물소리를 낸다. 평창동이 북한산 아래 서울의 첫 마을임을,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오게 됐음을 산과 물이 설명해 주고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대지 지형도 평창동의 특징이다. 게다가 대지는 두 필지를 합쳐 한 필지가 됨으로서 지형차가 커졌다.
김종영미술관의 설계자 류재은은 이용재와의 Interview에서 '이 미술관이 들어선 대지에선 계곡을 따라 유동하는 어떤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물과 공기, 화강암과 소나무들의 흐름이기도 하며, 이들이 함께 빚어내는 공간의 흐름이기도 합니다(-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2, 이용재-)'라고 대지의 느낌을 얘기했다. 설계자는 대지내 가장 좋은 풍광과 주변 주택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동쪽을 비웠다. 대지를 비우기 위해 김종영미술관 본관은 동쪽이 짧고 서쪽이 긴 ┎┒평면이다(위 위성사진 참고).
기능의 배분은 북서-남동방향으로 긴 Mass에 김종영의 상설·특별전을 하는 전시실을 배치하고 동쪽 북한산과 계곡이 위·아래로 보이는 곳에 사무실과 Cafe를 배치했다. 양쪽 두 mass를 연결하는 부분에는 2층 Lobby, 1층 시청각자료실이 배치됐다. 각 Mass에 담긴 Program의 상이함은 건물 입면의 상이함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건물이 감싸고 있는 외부정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차이가 극명하게 보인다(위 사진). 전시공간이 있는 서쪽 Mass의 외부마감은 모노쿠쉬와 VM Zinc이고 동쪽 Mass는 프로데마이다. 하지만 동쪽 Mass에서 조망을 열어둘 필요가 있는 남쪽 끝부분과 가운데 Mass 남쪽 입면은 투명유리로 처리했다.
건물의 다양한 입면재료와는 다르게 건물 주 출입구가 있는 평창32길에 면한 북쪽입면은 화강암으로 처리돼 있다(위 사진). 대지에서 Level이 가장 높은 북쪽에 난 미술관의 입구는 길의 선형을 따라 놓인 화강암 벽 중간에 무심히 뚫려 있다. 화강암은 미술관과 주변 도시가 만나는 북쪽 벽체 뿐만 아니라 지하층의 외벽이 되는 기단 부분에도 사용돼 있다. 그래서 건물은 마치 주변 대지에서 융기된 화강암 기단과 벽체에 의해 보호돼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설계자는 '이 화강암 담벽은 담이면서 건물의 외벽이며 성곽의 한 조각이기도 하다. 김종영 선생이 외부세계와 영합하지 않았던 생전의 자세를 적절히 표현하는 높이와 개구부, 진입방식에 고심했다(-들어보기: Interview, '축소된 대지, 그 암시를 위한 측정', 구영민, 건축과 환경(c3Korea), 200303(223)-)'고 설명한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 만나는 Lobby에서 오른쪽 1전시실로 들어서면 대지 지형을 따라 아래로 층층이 내려가는 연속된 전시공간을 볼 수 있다(위 사진). 사선으로 쌓인 여러 단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단이 갖는 역동적인 특징이 전시공간 내부에서도 느껴진다. 본관은 연면적 1,332㎡에 B2~2F규모다. 하지만 화강암 기단 아래 있는 지하층을 제외하면 지상 두개층은 정확하게 말해 Mezzanine Floor 형태다. 2층에 배치된 1전시실의 한쪽 부분은 2,3,4전시실이 있는 1층으로 트여 있다.
김종영 미술관 본관이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계단형으로 배치된 이유 외에도 구석구석을 비집고 스며드는 빛 때문이다. 사실 전시공간에서 외부로 난 창이나 입면의 개구부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전시시설의 입면은 개구부가 최소화된 공벽(Empty Wall)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종영 미술관 본관도 입면의 대부분은 공벽이다. 하지만 미술관이 앉혀진 대지의 주변 풍광을 설계자는 간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설계자는 전시공간 동쪽에 있는 외부정원을 향해 Mass를 수직으로 쓸어 내렸다(위 사진). 그리고 전시공간과 수직 개구부 사이에 계단을 두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오는 각각의 전시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은 더 역동적이고 조형적이 된다. 심지어 가장 아래층에 있는 4전시실에서 올려다본 계단은 전시공간에 있는 계단임에도 마치 종교시설에 있는 계단처럼 성스러워 보이기 까지 한다(아래사진). 이런 효과의 배경에는 계단이 시작되는 2층 Lobby공간과 북쪽 주출입구 화강암 벽체 틈사이에 만들어진 천창도 있다.
설계자가 전시공간임에도 외벽에 창을 적극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종영 미술관이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 전용 전시공간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설계자는 높은 천정고로 설계했고 그에 따라 3단으로 나뉘어지는 전시실을 밝히는 천창을 각각 두었다.
"나에게 창조라는 낱말은 없다. 자연의 물체가 자연스럽게 있듯이 나의 조형세계도 그렇게 될 것이다."
-Words from 김종영, Art in Space: 김종영 미술관,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는 것', 빌딩문화 200302(130)-
'不刻의 美'는 김종영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때 쓴 말이다. 사실 나도 김종영에 대해 아는 바는 깊지 않다. 그에 대한 설명 및 작품세계 등과 관련된 사항은 김종영미술관 Homepage를 참고하자. 조각가인 김종영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不刻의 美'로 설명한 건 역설이다. 조각가가 '조각을 하지 않는다(不刻)'니...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그의 Comment를 읽어보면 그 의미를 수박 겉핥기로는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깊게 해석하자면 그가 언급한 不刻은 조각이 단순한 사물의 Copy가 아닌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감각과 생명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토의 이데아같은 거다. 김종영 미술관의 건립목적은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와 그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을 만듦과 동시에 그를 잇는 젊은 조각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김종영 타계(1992년 12월 15일) 20주년에 맞춰 김종영미술관 본관이 개관했다.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나 신관이 완공되면서 각 건물에 이름을 붙였다. 본관은 앞서 언급된 '불각'이라는 단어를 이용한 '불각재'가 됐고 신관은 '사미루'라 붙였다. 사미루는 창원 읍성에 있던 사미당(四美堂)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미당은 조선시대 말 김종영 본가로 옮겨와 사랑채로 활용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집 안채와는 독립되어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곳을 일컫는다. 사미루의 Program은 신진 작가들이 일시적으로 전시를 여는 공간이다. 김종영 미술관 Homepage에 따르면 불각재(본관)는 '살아 숨 쉬는 교류', 사미루(신관)은 '단순함, 조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김종영이라는 조각 미술가의 작품을 담고 있는 곳임과 동시에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므로 미술관은 그의 작품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했다. 시건축 소장으로 있는 한철수는 '건축과 환경(c3Korea, 200303)'에서 ''인생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한 가치를 생활하는 것.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 김종영 선생의 글이다. 이러한 '무한한 가치'에 대한 자각은 작가의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관람객의 성향에 따른 상대적 경험은 그래서 중요하며, 이 미술관의 장소적 특성과 천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의 빛은 작품에 스며들어 다른 곳에서는 발휘될 수 없는 고유의 경험으로 기억된다. '사물이 지닌 내재적 속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되도록 하는 일'은 김종영 선생의 작품관이다. 장소와 건축되어야 할 기능이 가진 속성을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 우리가 이 미술관에서 한 작업이다.'라고 하면서 Contents와 공간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류재은과 한철수가 운영하는 설계사무소 이름은 시(始)건축이다. 의미는 '건축의 근원을 찾는 사무소'라고 한다. 미술관이 담고 있는 김종영이라는 조각가의 작품 철학과 미술관을 설계한 시건축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어떤 것의 '근원', '내재적 속성'이라니 뭔가 공유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김종영 미술관이 들어선 땅의 내재적 속성은 '흐름'이다. 지형 자체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져서 그런지 아니면 그런 지형이 대지로 흘러들어오는 북한산의 지세를 따라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대지 동쪽으로 계곡이 흘러서 그런지는 정확하게 꼬집을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세 흐름이 대지를 중심으로 합쳐지기 때문이겠지만- 미술관이 들어선 땅은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건축가는 전시공간을 땅의 흐름에 맞게 바닥 Level을 점차 낮춰가며 연속되게 구성했다. 흐름의 속성은 '연속됐다'는데 있다. 단절된 무언가에서 흐름은 형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건축이라는 행위 자체가, 특히 전시벽을 필요로 하는 전시공간의 건축은 반드시 벽을 필요로 한다. 벽은 흐름을 막는 요소다. 그래서 건축가 류재은은 벽 하나, 기둥 하나를 두는데도 섬세함을 기울여야 했다.
"류재은: 내외부 모든 공간들의 주된 흐름은 '계곡'이다. 전시공간은 4개인데 맨 위의 상설전시실로 부터 시작해서 물이 고였다 흘렀다 하면서 아래의 기획전시실로 내려가는 식이다. 제일 하단에서는 다시 그 흐름이 외부로 나아가 연못으로 떨어진다(위 사진). 전시실에 서면 제일 상부의 화강암 담벽부터 하단의 연못까지, 대지의 북단에서 남단까지, 거리를 읽으면서 이 대지에서 확보할 수 있는 최대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 조각품들은 '계곡'안의 바위나 나무처럼 전시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계절이 좋을 때 다목적으로 용도가 다양한 외부공간도 아래로, 연못으로 흘러 들어간다."
-들어보기: Interview, '축소된 대지, 그 암시를 위한 측정', 구영민, 건축과 환경(c3Korea), 200303(223)-
이러한 류재은과 한철수의 설계 의도에 대한 Critique을 구영민이 했다. 아래 인용한 글은 구영민의 Critique이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본다. 구영민의 Critique을 100% 이해할 만큼 내 지식의 깊이가 깊지 못하다. 다만, 설계자(류재은, 한철수)의 Comment와 구영민의 Critique, 둘을 비교해 보면 난 설계자의 Comment에 더 동감한다. 구영민의 Comment는 Critique을 위한 Critique처럼 느껴진다. 물론 구영민의 언급처럼 김종영미술관이 그 대지와 상호방해해서 한단계 더 나은것을 얻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발전적 단계 이전에 고려해야 할 건 설계 당시 미술관이 그것이 담고자 하는 김종영이라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반영해야 한다는 전제 아닌 전제다.
'불각'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종영이 조각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사물 자체가 지닌 고유한 감각과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김종영 미술관은 '그 건물이 앉혀진 땅이 지닌 고유한 감각과 생명을 발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래 구영민의 Comment대로 건축이라는게 대지를 방해하는 행위이기에 미술관이 앉혀진 대지의 속성이 '흐름'이라면 건축은 흐름을 방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기둥 하나, 벽 하나 놓는것 마저도 신중을 기했다는 설계자의 접근은 그것만으로도 '수정의 간격을 재는 제어장치로 작동하려는 의지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자가 미술관의 앉혀질 땅에서 '흐름'이라는 속성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불각'의 끄트머리는 본 것이다. 그럼 그 일의 실마리(끄트머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설계를 한다면 '불각의 미'를 찾기 위한 김종영의 조각행위는 건축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건축가 류재은과의 대담을 통해, 그가 건축물이 땅에 장해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신념이라기 보다는 집착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아주 조심스러운 '장소만들기(Place-making)'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그는 대지를 'Context'라는 한정된 말로 감금시키기 보다는 개방되고 자유로운 재발견의 장소로 풀어 쓰고자 한다. 그가 굳이 'Context'라는 어휘를 붙잡지 않으려는 것은 땅을 고정된 개념의 틀 안에서 보편화하여 획일적으로 정의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Context'에 관련해서 접근하는 방식을 살펴 보면, 두 가지의 기본적인 전략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으로 주변에 대한 유사모방, 조직적, 유기적 동화, 시각적 복합성을 들 수 있고, 두 번째로 복합성 가운데에서 거리두기, 재정의 전이 등의 기법을 들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을 통해서는 현실을 반영하고, 두 번째 방법을 통하여 그 배가(倍加)를 성취하고자 한다. 즉, 후자의 형식은 끊임없는 분할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벽을 쌓아 올리고, 외피를 만들고, 영역(지역)을 정의하고, 행위와 분열과 차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표현하며, 외부와 관련지어 분절된 내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중략)... 그는 대지로부터 찾아낸 단서들을 전체적인 맥락과 연계하여 또 다시 부분으로 치환시키고, 또 다른 전체에 귀속되도록 하는 연쇄적인 관계를 만들어감으로써 다양한 은유의 층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추구하는 은유의 고리가 너무 광범위하거나 수동적이어서 맥락을 연장하는 작업의 단계가 역력히 보인다는 점이다. 즉, 전체적으로 분절된 그 상태로 보이기 때문에 간결하고 정밀한 Idea나 생동감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종영 갤러리는 주변에 잡다하게 흐트러져 있는 주택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도 기존의 건물이지 새로운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교묘하게 분절된 지형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여기에서도 이러한 수동적인 은유의 Gesture가 류재은 건축의 약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지로부터 찾아낸 단서들을 전체적인 맥락과 연계하여 또 다시 부분으로 치환시키는 과정에서 은유를 통해 맥락을 연장하는 작업의 단계가 그저 다양한 층으로 분절되어 보인다. 즉, 의미의 확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화강암 벽은 서울의 성곽 Image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은유를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아쉽다는 것이다. ...(중략)... 대지와 건축은 물론 불가분의 관계다. 그런데 건축이 대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굵직한 신념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건축은 대지를 방해함으로써 새로운 장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방해를 지적하는 것은 자칫 잘못된 건축으로 대지 자체가 가진 본성을 깨뜨려 버릴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일 것이다. 그러나 상호방해, 즉 상호 오염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고서는 건축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간격의 수정을 통해서 얻은 측정장치로서의 건축을 다시 수정의 간격을 재는 제어장치로 작동하려는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틈」의 다이얼로그, 구영민-
김종영 타계(1992년 12월 15일) 28주년이 되는 2010년 12월 15일에 신관이 개관했다. 신관의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류재은&시건축이 아닌 최유종이 맡았다. 신관의 Program은 신진 조각가들의 기획전시공간으로 이를 통해 본관은 김종영의 상설전시공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김종영 미술관은 신관 건립을 위해 본관 남쪽에 인접한 대지(대지면적 466㎡)를 사들였다. 신관의 규모는 연면적 711㎡에, B1~2F으로 가장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지하층에 다목적 기획전시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이 담아야할 전시물이 항상 바뀌는 기획전시공간이므로 설계자는 전시실을 가능한 크게 설계했다. 지하층임에도 층고는 4m이고 전시물을 비추는 조명시설도 전시 Layout에 따라 변화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설계자가 시건축에서 최유종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신관 설계시 고려해야할 전제가 본관 설계시 고려해야할 때와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관이라는 또 하나의 Context가 더해졌다. 그런데 신관의 Design적 접근법은 본관의 그것과 어느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선 신관도 본관 만큼이나 대지의 고저차가 심했다(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부분이 평창동이라는 Context를 설명하는 부분 중 하나다). 게다가 대지 주변으로는 주변 주택이 상당히 빠듯하게 붙어 있다. 본관의 대지처럼 주변 풍광을 느낄 만한 여유가 신관 대지에는 없고 대지 자체만으로도 대지 내외부를 연결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신관은 본관과도 동선적으로 연결돼야 했다.
이러한 Constraint 속에서 설계자의 접근은 대지의 선형을 따라 Mass를 두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사미루의 평면은 대지가 접도돼 있는 동쪽과 남쪽으로 따라 '┛'형태다. 이에 따라 Mass로 둘러싸인 마당은 대지 가장 깊숙한 곳(북서쪽 Corner)에 위치하게 됐다. 설계자의 의도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대지가 그나마 열려 있는 동쪽 방향으로 건물의 1층 부분을 띄우기는 했지만(위 사진) 그래도 사미루의 마당은 폐쇄적이다. 마당으로 드러난 가장 높은 Level 쪽의 옹벽과 북쪽에 인접한 본관의 남측 입면은 비록 자작나무와 같은 식재가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대로 드러나 있다(아래사진). 사미루 신축 이전에 이 땅에 있던 건물이 정지(整地)를 마친 상태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찌됐든 사미루는 대지의 고저차를 설계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읽히지 않는다.
본관과 연결되는 방법에서는 본관의 '흐름'이라는 시건축이 찾아낸 땅의 속성을 가능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그 연결이 전시공간으로의 연결보다는 외부공간을 통한 연결이 더 극적이다. 본관 2층 Mezzanine Floor에서 시작된 전시공간은 본관에서 가장 Level이 낮은 4전시실 끝에서 유리 Bridge로 '띡' 꺽이면서 이어진다. 사실 본관 4전시실에서 이어지는 유리 Bridge의 개구부(아래사진에서 왼쪽 개구부)는 전체적으로 본관 북동쪽으로 난 개구부의 흐름 및 빛의 쏟아짐과도 맞지 않고 오히려 이로 인해 막힌 90cm 높이의 낮은 창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이런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보면 본관에서 시작된 관람동선이 역ㄷ자 선형으로 신관까지 연결되는 흐름은 무난하다. 그러나 그 흐름 상에서 관람객이 마주치는 Program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본관의 관람을 마친 뒤 Bridge를 통해 신관으로 넘어와 처음 만나는 신관 2층의 Program은 전시공간이 아닌 사무실과 관장실이다. 사미루의 주(Main) 전시공간이라 할 수 있는 지하층 전시실은 동선의 가장 마지막에 일부러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올라와야 한다.
이에 반해 외부공간의 흐름은 본관 동쪽에 있는 외부 전시공간에서 시작돼 류재은이 본관 내부의 흐름이 외부로 나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연못에서 180도 돌아 사미루 마당으로 이어진다. 물론 연못 위에 총총히 놓인 침석과 그 끝에 사미루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신관 설계시 건축가가 고려해야 했던 Constraint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연결의 Sequence상에서 보여지는 공간상의 다양한 변화에 따른 관람객들의 호기심 유발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기능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사미루에서 읽어야할 부분은 시건축이 본관을 설계할때 고려한 '무형의 전제'다. 여기서 무형의 전제는 본관이든 신관이든 김종영 미술관이 조각가 김종영의 예술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본관의 설계자에게 신관의 설계를 맡기지 않았듯이 미술관 측에서는 본관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신관에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최유종은 설계를 의뢰받았을때 '기존 미술관의 과도한 조형의지가 작가의 작품 해석에 자위적인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공간의 축소를 일으켰다'는 미술관 측의 해설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관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인위적인 해석보다는 자연과 인체를 소재로 순수 형태를 탐구해 온 선생의 구도자적인 정신과 방법론을 통하여 재해석 하고자 했다. 이러한 탐구는 특히 선생의 후기 추상작품의 창작 방법론에서 그 뜻을 찾고자 하였으며, 미술관 건축에서 기하학적인 순수성, 기술적인 정확성, 구조의 본질성과 재료와 요소들의 반복성, 그리고 장식의 정화와 제거를 통하여 구현되도록 한다. 이러한 작업은 건축적인 표현을 최소화함으로써 무언의 형태 속에서 표출되는 의미 찾기를 거부한다. 결국, 이것은 단순함을 기초로 물질과 정신을 잇는 진리 체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우성 김종영 선생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단조로운듯 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는 꾸미지 않는 소박함이다."
-Words from 최유종 in 건축문화 201104(359)-
사미루(신관)의 설계자 최유종의 위 Comment에 동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위에서 밝힌 설계자의 Design의도보다 건물 외장재료로 사용된 흰색석재와 그에 대비되는 검은색 Wall Frame이 최유종이 프랑스에서 실무경험을 한 Jean Michel Wilmotte의 건축언어를 읽히게 했다. Jean Michel Wilmotte는 평창 가나 Art Center 뿐만 아니라 인사 Gallery(아래사진)를 이러한 Black&White Mono-tone의 대비로 설계했다. 더불어 과연 본관을 두고 '간격의 수정을 통해서 얻은 측정장치로서의 건축을 다시 수정의 간격을 재는 제어장치로 작동하려는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Critique한 구영민은 신관을 보고는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