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2016년) 4월 12일 MoMA는 건축, Design 전시실(위 사진)을 폐쇄하는 결정을 내렸다. 'The Architects Newspaper'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MoMA는 이런 수장품들을 처분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전시품들과 함께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관련기사 : http://archpaper.com/2016/04/moma-to-abolish-architecture-and-design-galleries/ ). 이번 기사가 놀라웠던 점은 MoMA의 건축, Design 전시실은 전 세계 박물관 중 같은 주제로 지속적으로 유지된 첫 번째 사례라는 것과 그 시작이 Philip Johnson이었다는 것이다. 올 7월 8일은 그의 110번째 생일이다. 참고로 그는 2005년 1월 25일에 세상을 떴다. 현재 MoMA에는 30,000점의 건축모형과 도면, Drawing 등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Philip Johnson은 1930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에 MoMA의 초대관장이었던 Alfred Barr에 의해 건축부장으로 임명되됐다. 화려한 건축계 입문(?)이었던 셈이다. 하긴 그를 임명한 Alfred Barr도 당시 27세였기 때문에 Philip Johnson의 건축부장 임명은 그 전부터 이어온 MoMA의 연속된 파격 중 하나였다. 1932년 Philip Johnson은 Alfred Barr와 건축역사가인 Henry Russell Hitchcock의 기획 아래 'The International Style: Architecture Since 1922'라는 건축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는 미국 현대건축가들(Frank Lloyd Wright를 포함한)의 작품도 전시됐지만 초점은 Le Corbusier와 Mies Van der Rohe를 비롯한 Europe건축가들의 작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시 전시회에 초청됐던 Europe건축가들의 활동기반이 됐던 Bauhaus는 전시회 6개월 후에 나치에 의해 폐교됐다.
MoMA의 주요 Collection의 기반이 된 작품들은 John D. Rockefeller 2세의 부인 Abby Aldrich Rockefeller와 그녀의 절친이었던 Lillie Bliss, Marry Quinn Sullivan의 소장품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소장품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을 전시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그렇게 1929년 11월 8일 MoMA가 탄생했다. 하지만 9일전 'Black Tuesday'가 터졌고 전세계는 경제 대공항에 빠졌다. 그렇게 지연된 MoMA전용관 건립 사업은 몇 년 후 Abby Aldrich Rockefeller가 John D. Rockefeller 2세와 결혼 직후 생활했던 지금의 MoMA부지를 기부하면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용관 설계자 선정 문제 등에서 Alfred Barr는 건축위원회와 충돌을 빚었고 결국 1943년 관장직에서 해고됐다. Philip Johnson은 그 보다 7년 앞선 1936년(그의 나이 30세)에 MoMA를 떠나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Philip Johnson이 한 이 정치활동이라는 것이 참 웃긴다.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가가 바로 나치의 포츠담 대집회를 목격하면서 부터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Fascism이론가이자 경제학자였던 Lawrence Dennis와 함께 파시스트 활동에 전념한다. 나치는 Bauhaus를 문화적 Bolshevikism이라 간주하고 폐교를 결정한 정치적 집단이었다. 금방 실증을 냈기 때문이었을까? 건축 Style에서의 카멜레온 같은 행동은 정치적 신념에서도 이어졌다. Philip Johnson은 1940년 히틀러가 자신이 원하던 영웅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34살의 나이에 Harvard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1946년 그는 MoMA로 돌아왔다. 그가 세상을 뜬지 10년이 넘자 젊은 시절 그의 정치활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래는 그가 살았을때 이에 대해 Hanno Rauterberg와 나눴던 대화다.
"Hanno Rauterberg :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늘 당신 삶의 일부였고 심지어 당신을 철저한 우파로 이끌기도 했어요. 당신은 처음에는 Bauhaus를 선전하더니 몇 년 후 종군기자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전쟁에 참전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방향을 180도 바꿀 수 있었나요?
Philip Johnson : 오히려 U-Turn하지 않았다는 게 유감인걸요. 급진주의에 대한 애정, 모든 사물에 침투하고 백지상태에서 사람을 표현하는 미적 양식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실제로 Bauhaus와 나치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어요. 둘 다 역사를 만들길 원했죠. 물론 나도 역사의 일부분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 나는 한창 젊은 나이였어요. 한동안 Stalin에 매료되기도 했죠.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요. 이런 오해가 평생 동안 나를 따라다녀요.
Hanno Rauterberg : 이념적인 것에 대해 면역이 생겼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Philip Johnson : 나는 이념과 건축이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건축에는 선도 악도 없어요. 이런 윤리적인 질문을 받으면 사실 짜증이 나요."
-나는 건축가다, Hanno Rauterberg-
1946년 Philip Johnson은 건축부장직에 재임명된다. 참 Philip Johnson이라는 사람이 웃긴건 복귀후 그가 기획한 전시회가 Mies Van der Rohe 건축전이었다. 그리고 1950년부터 그는 열렬한 Mies의 추종자가 되고 전세계 마천루에 길이 남을 이정표 Seagram Building을 Mies와 함께 설계한다(위 사진).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 됐지만 Mies는 Philip Johnson이 지지한 히틀러와 나치만 아니었으면 그가 그토록 폐교만은 막았던 Bauhaus를 폐교시키고 미국으로 오지 않았어도 됐다. 뭐 어찌됐든 Philip Johnson은 1954년 MoMA 건축부장직을 다시 그만두기 전까지 MoMA의 몇차례 증개축에도 변함없이 남아 마치 Central Park가 Manhattan을 더욱 빛나게 해주듯 MoMA를 가치있는 Museum이 될 수 있게 해준 Abby Aldrich Rockefeller Sculpture Garden(1953, 아래사진)과 Grace Rainey Rogers Annex(1951)를 설계한다. 그의 나이 마흔 중반대 일이다.
MoMA에서 W53rd st을 따라 동쪽으로 한 Block, 그리고 Madison Ave를 따라 북쪽으로 두 Block만 가면 그의 1984년작 Sony Tower(舊 AT&T Building)가 나온다(직선거리 350m, 위 사진). 이 건물은 Manhattan 마천루를 구성하는 고층건물 중에서도 양식사적으로는 Mies van der Rohe와 역시 Philip Johnson이 함께 설계한 Seagram Building(1958) 만큼이나 논쟁을 일으킨 건축물이다. 논쟁의 초점은 이 건물이 Manhattan에 들어선 첫 번째 Post-Modernism 양식의 고층건물이라는데 있었다. Seagram Building과 Sony Tower의 설계자가 모두 Philip Johnson이라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 사이에 26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한다. Sony Tower는 197m라는 높이에 비해 규모는 연면적 74,000㎡와 37층으로 그렇게 크지 않다. 왜냐하면 1층 Lobby가 일반건물 7개층에 달하며, 건물 꼭대기 뻥뚫린 원형 개구부와 바로 아래 수직으로 긴 띠창이 있는 부분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건축요소는 양식사에서 Sony Tower를 Post-Modernism으로 분류하는 요소다. 어떻게 Philip Johnson은 그의 나이 78세때 설계한 건물(Sony Tower)과 40대 중반에 설계한 건물 간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도 그로부터 직접 듣는게 좋을 것 같다.
"Hanno Rauterberg : 당신은 건물의 인상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Style을 항상 바꾸는 것으로 유명해요. 형상과 재료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Philip Johnson : 의미라고요? 건축은 미관을 더하고 정신을 고양해야 해요. 의미는 필요하지 않아요. 건축은 정치나 철학이 아니니까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초기 Modernism의 커다란 오류였어요. Modernist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석적인 표현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Modernist들은 세상을 개선하고 싶었지만 건축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어요.
Hanno Rauterberg : 그럼 건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
Philip Johnson : 건축은 사람들을 즐겁거나 놀라게 하고 또 기분 좋게 할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아주 큰일을 하는 셈이죠.
...(중략)...
Hanno Rauterberg : 나는 당신이 Modernism의 사회적 야심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폐기하는 것이 놀라워요. 당신도 Modernism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고 New York에서 중요한 건축 전시회를 열어 미국에 Bauhaus를 처음 알렸잖아요. 윤리적인 관심과 미적인 측면을 분리할 수 있었나요?
Philip Johnson : 물론이죠. Water Gropius를 알게 됐을 때 대중에게 Utopia를 약속한다는 그의 환상을 처음부터 의심했어요. 나는 Modernism을 하나의 양식으로 봤어요. 흥미를 느낀 것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들이었지요. 나는 혁명적인 전환, 즉 변화를 좋아했어요."
-나는 건축가다, Hanno Rauterberg-
Modernism이 됐든 Post-Modernism이 됐든 Philip Johnson은 Trend를 만들어내는 선구자는 아니다. 하지만 뭐가 됐든 Issue로 제기된 뒤 그 사이에서 이런 저런 얘기가 쏟아지고 있는 Trend를 크게 공명시키는 역할은 확실하게 한 건축가다. 어쩌면 이런 면이 카멜레온 같이 자신의 건축 Style을 바꾸는 Philip Johnson의 영향력인지도 모르고 이 때문에 그가 첫번째 Pritzker Prize를 수상했는지도 모르고. Sony Tower가 건축양식적으로 주목받는 Post-Modernism양식의 고층건물이라는 의미도 Manhattan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빼면 선구자는 Philip Johnson이 아닌 Michael Graves다. 흥미로운건 Michael Graves도 Philip Johnson처럼 카멜레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건축언어를 New York5로 불리는 White파에서 Post-Modernism으로 급격하게 바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첫 번째 건물이 바로 Post-Modernism 양식으로 설계된 최초의 대형건축물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Portland Building(위&아래사진)이다.
Portland를 방문하기 전 Portland Building은 건축사에서 가지고 있는 앞서 언급한 이유로 꽤 관심가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실제 봤을때는 별다른 인상을 느끼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건물이 지어진 1980년은 Post-Modernism 양식의 건물이 등장한 뒤로도 10여년 이상 흐름 시점이었다. 그나마 흥미로웠던 점은 이 건물이 Portland市 관련 공공시설이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공공기관의 건물은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다. 역사, 권위 뭐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Portland Building은 잘 포장된 선물 Box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전주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Michael Graves는 급격히 변화된 건축언어로 이 건물을 설계한 걸까? 이에 대한 답고 Graves로부터 직접 듣는게 좋을 것 같다.
"While any architectural language, to be built, will always exist within the technical realm, it is important to keep the technical expression parallel to an equal and complementary expression of ritual and symbol. It could be argued that the Modern Movement did this, that as well as its internal language, it expressed the symbol of the machine, and therefore practiced cultural symbolism.
But in this case, the machine is retroactive, for the machine itself is a utility. So this symbol is not an external allusion, but rather a second, internalized reading.
A significant architecture must incorporate both internal and external expressions. The external language, which engages inventions of culture at large, is rooted in a figurative, associational and anthropomorphic attitude."
-Michael Graves: Buildings and Projects 1966-1981, Michael Graves-
Michael Graves는 Portland Building 이후 확실한 Post-Modernism 건축가로 돌아선다. 여기에 Pop-art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미국에서 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된다. 오죽하면 지금은 무산됐지만 2004년 덕수궁 인근 선원전터에 추진됐던 미대사관 공관 설계를 그가 맡았다(아래조감도). Philip Johnson의 생일 다음날인 7월 9일은 Michael Graves의 생일이다(올해 82번째). 물론 그도 작년(2015년)에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