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에펠탑이다. 그런데 솔직히 직접 본 에펠탑은 실망스러웠다. 특히 낮에 에펠탑을 보면 철골 덩어리 처럼 보일 뿐이다. 스스로 '안목 없음'을 시인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낮에 본 에펠탑에서 힘의 모멘텀이나 래티스구조 등이 주는 감동은 없었다. 파리의 Urban Pattern에서도 에펠탑은 Champ de Mars와 센강이 만나는 부분에 있다는 정도다. 방사선 도로에 기념비적 도시계획이 특징인 파리에서 Urban Pattern적으로 랜드마크는 단연 12개의 길이 만나는 개선문(Arc of Triomphe)다. 게다가 개선문에서 뻗어나가는 길 중 샹제리제거리(Av.des Champs-Elysees)는 파리를 대표하는 길이고 그 반대편으로 뻗어나가는 Avenue de la Grande Armee는 라데팡스로 꽂힌다. 올(2016년) 7월 29일은 개선문 완공 180주년일이다.
개선문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는 샹제리제거리는 루브르 박물관 영역과 만나는 콩코드광장(Place de la Concorde)에서 끝난다. 콩코드 광장 한가운데 있는 Luxor Obelisk가 샹제리제 거리의 동쪽 Visual Terminus를 이룬다. 전체 길이 1,880m의 샹제리제 거리는 파리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축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Axe Historique'라 불린다. Henry IV의 왕비였던 Marie de Medici가 Palais des Tuileries의 정원을 확장하기로 한 1616년까지 샹제리제 거리는 야채를 재배하는 들판이었다고 한다.
Marie de Medici 왕비가 생각했던 축은 후에 개선문이 있는 Place de l'Etoile까지 연결됐다. 조경가였던 Andre Le Notre에 의해 설계된 옛 Medici정원의 확장은 파리의 확장을 막아오던 성곽 안쪽 경계가 넓어짐을 의미했다. 1700년대 후반, 현재 대통령 궁으로 쓰이고 있는 엘리제 궁 등이 샹제리제 거리에 면해 지어지면서 거리는 점차 상류층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다.
Camillo Sitte는 '예술적 원리에 의한 도시계획'에서 '오늘날(이 책이 1889년 출판됐음으로 대략 1800년대 말~1900년대 초를 의미한다)은 광장의 중심이야말로 Monument를 배치하는 유일하게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장은 아무리 커도 단지 하나의 Monument로 밖에 맞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만일 광장이 불규칙한 형태를 하고 있고 기하학적으로 중심점을 정할 수 없게 되면, 단 하나의 Monument까지도 둘 수 없기 때문에 광장은 완전하고도 영구히 빈 공터가 되어 버리며, 이 문제는 점점 무거워지게 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염려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 콩코드 광장이다. 콩코드광장에 놓여진 단 하나의 Monument가 앞서 언급한 Luxor Obelisk다. 물론 Luxor Obelisk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각각 분수가 배치돼 있지만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다. 콩코드광장은 Ange-Jacque Gabriel의 설계로 1755년에 만들어졌다. Luxor Obelisk는 23m 높이로 1831년 이집트에서 받은 것(?)이라 한다. 1836년 Louis-Philippe에 의해 현재 위치에 놓여졌는데, Obelisk가 놓이기 전 이 자리에서 LouisⅩⅥ와 Marie Antoinette의 목을 날린 기요틴이 있었다.
Luxor Obelisk가 Axe Historique의 한쪽 끝이라면 그 반대편 끝에 개선문이 있다. 개선문 주변의 Place de l'Etoile에는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원형으로 마련돼 있지만 그곳에 서면 광장 보다는 로터리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개선문은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죽은 모든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이지만 특히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전사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개선문의 아치 가운데 아래에는 세계1차대전의 무명용사 묘비도 있다. 개선문은 1806년 Jean Chalgrin이라는 사람에 의해 높이 49.5m, 폭 45m, 깊이 22m의 크기로 설계됐다. Jean Chalgrin은 로마의 Arch of Titus에서 Design Motive를 얻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개선문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그가 죽은 뒤 Jean-Nicolas Huyot이 공사를 맡았다.
한 개인에 의해 기획된 기념비는 그 기획자가 사라지면 기념비 역시 사라지거나 최소한 힘을 잃는다. 개선문도 그 기념비를 계획한 나폴레옹이 실각(1814년)하자 장기간 건설이 중단됐다. 그러다 1836년 7월 29일 겨우 완성됐다. 개선문 완성 이후 파리는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재무대신 페르시니 그리고 지방장관이었던 Eugene Haussmann남작에 의해 말 그대로 대개조가 일어났다. 다시 과거로 가는게 조금 헷갈리겠지만 현재 파리의 Urban Pattern과 개선문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으로 가야할 것 같다.
1750년경부터 1800년대 초반까지 서유럽은 계몽주의사상이 지배했고 이 사상이 당시 기본적 가정들을 재정비했다. 개몽주의는 이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 유럽 전제군주 체제의 붕괴, 공화정과 민주적 이상의 수립과 같은 정치적 대사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며, 그 안에 내재된 구조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초기 바로크 사상의 부활을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새롭게 대두된 경험적 과학을 인간에 대한 연구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명확한 경험적 연구는 필연적으로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 사이에 공유됐다. 즉, 그들은 자연과학이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고 지배할 수 있듯이,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지식 역시 과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 행동을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가정은 철저하게 맞았는지도 모른다. LouisⅩⅥ세를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에 이어 등장한 건 인간의 역사가 늘 그렇듯이 또 다른 절대권력인 나폴레옹이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보는 관점에서도 혁명시대의 계획가들은 움직임을 방해하고 시야를 가리는 모든 자연의 장애물들을 제거한 열린 부피를 창조하고자 했다. 자유의 부피는 움직임의 자유에 대한 계몽주의 신념을 극에 달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을 이끈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등장한 건 또 다른 절대권력이듯이 19C 도시를 보는 관점도 혁명시대와 완전히 달랐다. Richard Sennett은 '살과 돌; 서구문명에서 육체와 도시'에서 '19C의 도시계획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개별자들의 집합을 창조하고 도시를 통해 조직화된 단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19C 도시설계는 도시에서 수많은 개별자들은 움직일 수 있고 프랑스혁명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위협적인 집단들의 움직임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 시대 도시학자들은 도시의 군중을 통해 움직임에 자극된 개인을 생각했고 19C 도시학자들은 움직임으로 인해 군중으로부터 보호받는 개별자들을 생각했다.
1830년 '7월혁명' 그리고 다시 1848년 '2월혁명' 후 같은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나폴레옹3세는 제2제정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루동이 얘기한 데로 1848년의 봉기 운동에서 얻은 것은 '하나의 억압적인 정권을 다른 하나의 정복 정권으로 갈아치우는 것 뿐'이었다. 나폴레옹3세 하에 Eugene Haussmann남작은 파리를 19C 도시를 보는 관점에 맞게 철저하게 개조했다. 그리고 그 개조에 대한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확실한건 지금의 파리를 만든건 Eugene Haussmann이었다. 그의 파리 대개조사업에 대한 평가는 늘 극명하게 갈린다. 그의 계획에 대해 가장 자주 나오는 혹평은 프랑스 혁명을 겪은 후 시민폭동에 대한 효율적이고 빠른 진압을 위한 것이 내용이 골자다. 실제 1871년 파리 코뮨의 빠른 진압을 통해 이런 주장이 증명됐다. 그러나 Hobsbawm은 'Cities and Insurrectons'에서 '폭이 넓은 새길이 대중시위 내지 대중행진에 이상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서 집회가 폭동이 아닌 의례적인 행진으로 바뀌었다'라고 주장하며, 다른 형태의 집회양상이 등장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Eugene Haussmann의 파리 대개조사업에 대한 호평은 단연 흑사병과 혹독한 위생상태를 한번에 개선시켰다는 내용이다. 실제 개선문 완공 후 17년이 지난 1853년에 파리지사로 임명된 Eugene Haussmann은 계획 담당에 건축가 Deschamps 뿐만 아니라 수도공급과 하수시설 담당에 기술자 Belgrand, 공원과 녹지시설 담당에 기술자 Alphand을 임명했을 정도로 위생상태 향상에 관심이 컸다. 흥미로운 사실은 Eugene Haussmann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현장에서 살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는 사무실을 떠난 적이 들물 정도로 공사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Eugene Haussmann은 어떤 모습으로 공사가 됐는지 공식적인 개막식에서야 확인했다고 한다. 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도면에서만 이루어진 계획이었기에 그 실현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Eugene Haussmann에게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예산, 총계획, 기반시설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조였던 것 같다. 결국 파리는 전략적이고 행정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의 복합체였던 셈이다.
Eugene Haussmann은 '대도시, 즉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은 진정 국가의 역할에 적합해야 하'며, '더구나 프랑스의 중앙집권제는 수도를 전체의 결정적인 힘의 원천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만약 수도가 그 명예로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습에 얽매여 있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Eugene Haussmann의 이런 생각에 대해 David Harvey는 'Paris, Capital of Modernity'에서 '철저한 단절이라는 신화를 통해 자신과 황제를 포장했다'고 평가했다. David Harvey는 Eugene Haussmann이 이전에 도시계획적으로 시행된 것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임증함으로서 자신과 나폴레옹3세가 지나간 과거의 사고방식이나 관례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Eugene Haussmann은 이를 통해 모든 정권에서 필요로 하는 건축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이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메세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Eugene Haussmann의 파리 대개조계획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정치적 메세지와 절대권련의 표현은 이후 유럽내 같은 목적으로 도시를 개조하고자 하는 도시들 - Vienna, Berlin- 의 Model이 됐다.
Eugene Haussmann의 파리 대개조사업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미국으로 넘어와 'City Beautiful Movement'로 희미하게 이어졌다. Eugene Haussmann의 파리 대개조사업에서 개선문은 이 부분에서 역할이 컸다. 실제 뉴욕 맨하튼의 Washington Square Park는 과거 연병장이었는데, 이를 시민들을 위한 공공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아치를 설치했다. 이 아치는 현재 Washington Square Park의 주요한 Identity를 이루고 있는데, 1889년 George Washington 취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임시구조물이었는데, 인기가 지속되자 1892년에 대리석으로 23m 높이로 다시 만들었다(아래사진). 그런데 이 아치를 설계한 Stanford White가 Design Motive를 가져온 대상이 파리에 있는 개선문이었다. 한때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로마-파리-뉴욕에 세워진 각각의 개선문들(Arch of Titus-Arc de Triomphe-The Washington Square Arch)은 모두 같은 디자인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그 패권의 정당성을 가져온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