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시절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난처 한곳이 있었다. '심지'라는 음악감상실로 1500원 가량을 내면 DJ가 틀어주는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소파는 끈적거렸고 담배 연기는 자욱했지만 그 어둠 속에서 난 증발할 수 있었다. IPTV와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생각하면 선뜻 이해 안되는 시스템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X-Japan과 Metallica의 뮤직비디오는 내가 신청하는 단골 밴드였다. 중간중간 DJ의 권한으로 틀어주던 뮤직비디오 중 기타(Guitar)를 정말 잘 치는 흑인 뮤지션이 있었다. 기타를 치아로 물어뜯고 바닥에 힘껏 내리치던 그의 퍼포먼스(Performance)는 10대 후반이었던 내게 이상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해줬다. 그가 바로 기타의 신(神), Jimi Hendrix다. 그는 1970년 9월 18일, 27세의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요절했다. 2002년 8월 영국의 한 음악전문잡지('Total Guitar')에서 100호 발간 기념으로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결과 그는 Led Zeppelin의 기타리스트 Jimmy Page를 재치고 1위를 차지했다.
Jimi Hendrix는 1942년 11월 27일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이대호가 활약하고 있는 MLB 매리너스(Mariners)의 연고지이자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스타벅스가 시작된 도시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도 시애틀에서 시작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은 Bill Gates다. 그런데 그와 공동창업한 인물이 있다. 바로 Paul Allen이다(위 사진). Paul Allen과 그의 여동생 Jody Allen(과거에는 Jody Patton)은 동시대 시애틀에서 활동했던 Jimi Hendrix의 팬(Fan)이었다. 이 남매는 Jimi Hendrix의 유품을 하나둘 사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그를 기리기 위한 조촐한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Paul Allen이 그 건물의 설계를 Frank Gehry에게 의뢰했다. 여담이지만 Jimi Hendrix가 요절하기 3년 전인 1967년 2월 20일,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州의 Aberdeen에서 그룹 Nirvana의 Kurt Cobain이 태어났다. Kurt Cobain은 그의 나이 26세가 되는 1994년 4월 5일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아마도 시애틀을 대표하는 건물은 Space Needle일 것이다(위 사진). John Graham이 설계한 이 건물은 1962년 열린 세계만국 박람회때 지어졌다. 완공 당시 미 서부해안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던 Space Needle은 2016년 9월 기준 시애틀에서 8번째로 높다(높이184m). Space Needle 북동쪽에 마구 구겨 놓은 여러 색깔의 종이를 모아놓은 것 같은 건물이 Paul Allen과 Jody Allen이 Jimi Hendrix를 기리기 위한 조촐한(?) 박물관 EMP(Experience Music Project)다.
외관에서 보이는 모습은 차치하고 EMP의 연면적(12,600㎡)만 봐도 조촐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EMP는 처음 본 Frank Gehry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Space Needle을 제치고 시애틀 방문 1순위였다. EMP의 전체적인 형태를 한 번에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뭐 그래도 굳이 하자면 'Holistic Composition'이라 해야하나. EMP에서 구입한 엽서에서 Gehry의 컨셉(Concept)을 확인할 수 있었다(아래사진). Gehry는 이 건물이 기념하는 Jimi Hendrix가 연주 중 자신의 기타를 산산 조각내는 모습에서 컨셉을 얻었다고 한다. 10대 후반의 내가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그 장면이었다. 그런데 Gehry의 컨셉이미지 자체도 Jackson Pollock이나 Kandinsky의 회화 같다. 현대미술에서 느꼈던 어지러움이 이제 현실로 구축되고 있다는 생각이 엽서를 사면서 들었다.
"In 1969 a screaming, reverberating rendition of the Star Spangled Banner by Jimi Hendrix seemed to herald an end to innocence. His resonant lyric "Are you experienced?" is now recalled in the name of software billionaire Paul G. Allen's Experience Music Project. Hendrix would have appreciated the design approach to Seattle's new museum of pop music.
Architect Frank O. Gehry has made a career out of bending vertical and horizontal lines of building construction into something defiant and sometimes poetic. With Seattle's EMP, opened just over a week before the Fourth of July, he has met his perfect client in Allen and his metaphorical match in rock-'n'-roll. The resulting architecture is a unique performance and a new landmark on the edge of the Seattle Center."
-"Frank Gehry Rock Temple", in ArchitectureWeek No.9, Clair Enlow, 2000.07.12-
Gehry에게 건축의 형태는 직관에서 오는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로운 한가지는 현재 EMP의 형태가 Gehry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계획 단계에서 Gehry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블럭(Block)이 켜켜히 쌓여 있는 매스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계획안에서 블럭은 하나의 마을을 상징했다. 문제는 Paul Allen이 그 일관성 있는 형태의 계획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Gehry는 그 모형을 깨부수었고 그러자 Allen도 마음에 들어했다. 이 과정에서 Gehry는 '들판에 있는 사물들, 가령 마을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그 아이디어를 경직되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게리-Frank Gehry가 털어 놓는 자신의 건축 세계, Mildred Friedman&Michael Sorkin-).
내부에 여러 개의 전시실을 둔 원룸(One-room)창고 형태의 초기 계획안은 외관재료로 지금 사용된 메탈(Metal)이 아닌 테라초(Terrazzo)였다. Gehry가 테라초 외관을 생각했던 이유는 건축주가 다양한 색감을 갖기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라초를 사용할 경우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여러 종류의 메탈을 사용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를 위해 Gehry는 Paul Allen에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여기에 있지만 나는 재료에 대해 좀 더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테라초에 대해 좀더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예산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외관재 변경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Gehry talks : Architecture and Process, Mildred Friedman & Frank Gehry-).
EMP의 현재 외관재인 메탈은 여러가지 색을 띄고 있다. 정북을 기준 시계방향으로 은색, 붉은색, 금색, 하늘색, 자주색이 사용돼 있다(위 구글위성사진 참고). 특히, 서쪽 9시 방향 입면을 덮고 있는 자주색 메탈은 빛의 각도에 따라 변한다. 입면의 색깔과 더불어 형태적인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모노레일이 남에서 서로 관통하는 하늘색 매스다. 하늘색 매스 서쪽에 모노레일이 들어오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의 모습이 마치 바람이 불어 흩날리는 커튼 같다. 메탈이라는 소재가 패브릭(Fabric)처럼 가볍다(아래사진에서 오른쪽). Gehry가 종종 시도하는 자유로운 형태에 대한 도전이다.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하늘색 매스 내부에는 'Artist's Journey'라는 전시공간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펑크라는 음악사에서 그닥 중요시 되지 않았던 장르가 얼마나 신나는지를 아이맥스(I-max)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4D극장처럼 모든 감각이 커다란 화면과 의자의 흔들림으로 압도당한다. 개인적으로 EMP는 너무 좋은 경험과 떠나기 싫은 장소였다. 건축과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에게 이 두가지를 그것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채워준 공간이었다. 특히 'Play on'이라는 전시공간에서는 1950년대 기타리스트부터 현재 활동중인 RATM의 기타연주 그리고 당연히 Jimi Hendrix의 전설적인 기타 연주 장면까지 볼 수 있었다.
건물의 내부에서 무엇보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공간은 'Sky church'다. Jimi Hendrix가 만든 이 말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음악을 만들고 들으며, 친분을 쌓고 의사소통을 하는 꿈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갖가지 음악에 맞춰 26m 높이의 스크린에 현란한 그래픽이 움직인다. 빛의 예술이다. 화면이 시작되면서 난 움직일 수 없었다. Sky church와 더불어 또 하나 볼거리는 해드셋(Headset)을 빌려주는 곳에 있는 'Roots&Branches'다. 기타 위주로 악기들을 붙여서 만든 원기둥인데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EMP의 내부 공간도 외부의 매스 형태처럼 벽면, 천장, 위층, 아래층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 형태, 기능, 스타일.... 모든 면에서 틀이 부서지고 뒤섞여 있다. 지금은 여기까지 설명한 전시내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내가 EMP를 방문한 것도 벌써 14년 전이다(그래서 첨부된 사진이 너무 오래된 거네요. 양해해 주세요).
Jimi Hendrix는 1967년 미국 Monterey Pop Festival에서 유명새를 탔다. 공연 직후 LA Times는 그가 이끄는 그룹 Jimi Hendrix Experience를 '미래를 흔들 인물들'로 평했다. 그가 했던 많은 명언 중 'I'm the one that has to die when it's time for me to die, so let me live my life, the way I want to'가 있다. 그는 10년도 안 되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정말 불꽃처럼 살다 갔다. EMP를 보고 관람하면서 그 불꽃이 자꾸 겹쳤다. 그 불꽃을 느끼고 나서 14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불꽃처럼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 결국 지금, 현재가 불꽃 같아야 하는데... 내일 아침 출근길에 그의 음악을 들어야 긴 연휴의 무거운 덮개를 걷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