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 따뜻한 햇살을 맞고 싶은 내 바램과 사람구경이 아닌 꽃구경을 하고 싶다는 아내의 바램을 채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아이도 맘껏 뛰어놀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지도를 휘휘 돌려보고 있는데 '장욱진 고택'이 생각났다. 늦은 아침을 먹고 그곳으로 향했다. 마북로105번길에 다다르자 네비게이션은 운전자 대부분이 피하고 싶은 길(마북로)로 안내를 했다. 인터넷으로 사전에 찾아 보기는 했지만 주변에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건물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괜히 좁은 길로 잘못 들어 생길 수 있는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마북로105번길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길을 따라 들어가 봤다.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았을 때 정말 쌩뚱맞게 한옥 건물이 나왔다.
살짝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남여가 문살에 창호지를 바르고 있었다. 뭐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 열었나요?'라는 질문은 무슨 가게집에나 쓰는 표현 같았고 그렇다고 '개관'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박물관이나 전시관 같은 시설이 아니기에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이럴 땐 아이를 들이미는 게 상책이랴... '저 애기랑 왔는데, 들어가 볼 수 있나요?' 고민 끝에 나온 말 치고는 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어찌됐든 찻집 안쪽에서 한 여성이 '그러세요'라고 말하며 웃는. 첫눈에도 사진에서 본 장욱진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의 딸이었다.
마북로 105번길에 차를 세울 때 받은 인상처럼 장욱진 고택 주변은 어수선하다. 고택이 좁은 길(마북로)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 번에 인지되지 않을 뿐더러 고택 북쪽으로는 고층아파트 단지와 한성CC가 있고 고택에 면한 주변에는 용인이 지금 용인의 모습을 갖추기 전 무분별하게 들어선 집장사 연립주택들이 되는대로 들어서 있다. 일단의 택지개발이 아닌 아파트 단지가 도시기반시설 설치 기준을 살짝 하회하는 규모로 연속해서 개발된 용인에는 옛 길과 새로운 길이 뒤섞여 있다. 장욱진 고택 주변은 용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이전 집단 취락지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북로에 면해 역ㄱ자 평면으로 앉혀진 건물(위 위성사진에서 오른쪽 빨간 테두리가 그려진 건물)은 서쪽에 ㅁ자 평면으로 배치된 한옥(가운데 빨간 테두리가 그려진 건물)과는 별동으로 2005년 문을 연 찻집이다. 2005년은 장욱진 고택의 문화재 지정을 두고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때로 당시 관할 행정기관인 용인시와 경기도는 뭐 그냥 있었다. 그래도 알아서 찾아주는 방문객들을 그냥 돌려보내기 미안해 따님이 찻집을 열었다. 여기 대추차 진짜 맛있다.
서양화가 장욱진은 1918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현재 용인시의 땅은 지자체들이 취하는 컨텐츠(Contents)로서 '생가(Birthplace)'는 아니다. 하지만 1990년까지 그의 72년 생애 중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거처였다. 그는 이 땅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작품 성향과 특징도 그가 작업장소를 옮긴 다섯 단계로 나뉜다. 각 시기별 장욱진 작품성향과 특징은 장욱진 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를 참고하고 여기선 시기와 공간만 살펴보자.
1938년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수상한 때부터 1962년까지를 장욱진 초기시대로 본다. 이 시기 장욱진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교수로 재직했었다. 교수를 그만둔 1960년 그는 명륜동 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후 1963년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한강가에 화실을 짓고 혼자 12년을 생활한다. 장욱진 생애 2기, '덕소시대'다.
이후, 1974년 공간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갖고 덕소생활을 청산한다. 그리고 1975년 앞서 얘기한 명륜동 한옥에 화실을 꾸민다. 장욱진 생애 3기, '명륜동 시기(4년)'가 시작된 것이다. 1980년에는 충북 수안보 상모면 온천리의 농가를 화실로 고쳐 사용하면서 장욱진 생애 4기, '수안보시대'를 시작한다. 5년 뒤인 1985년 수안보 화실을 청산하고 늘 그렇듯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용인 현재 땅을 지나다 1884년에 지었다는 한옥을 보고 화실을 차린다. 그렇게 그의 마지막이 된 '신갈시대'가 시작됐다.
"(신갈시대 장욱진의 화풍은) 먹그림풍 유화와 풍경이 줄어들고 점차 환상적이며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며 파격적인 구도와 자유로운 표현이 최고조에 달한다. 특히 1990년도에는 늘 이야기하던 '삶이란 소모하는 것,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다 쓰고 가야겠다'는 화두에 걸맞게 초탈한 경지의 작품을 남기고 간다."
-Words from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이곳으로 이사 온 1986년은 지금부터 30년 전이지만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사 오고 3년이 지난 1989년 장욱진은 자신이 직접 설계해서 한옥 북쪽에 적벽돌 양옥집을 만든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 12월 27일 세상을 뜬다. 2,013㎡ 규모의 땅에는 세 가지 시대의 건축물이 공존한다. 앞서 설명한 찻집을 포함해 ㅁ자 안마당을 끼고 있는 한옥과 그 북쪽에 세 개의 지붕창과 굴뚝이 특이한 벽돌조 건물(앞서 위성사진에서 가운데 파란색 테두리가 그려진 건물) 그리고 대지 서쪽 끝, 시간이라는 강한 무기를 지닌 두 건물과는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시멘트 블럭을 쌓아 만들어진 역ㄱ자 평면의 주택(위 사진, 앞서 위성사진에서 왼쪽 녹색테두리가 그려진 건물)이 살짝 빗겨나 있다. 이용재의 책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3'에는 이 주택의 설계자를 김진애로 썼다. 직사각형 매스가 만나는 가운데 2층 벽에 장욱진 그림이 걸려 있다. 글씨 하나 없는 간판이다.
ㅁ자로 배치된 한옥은 네 개 모서리가 아닌 북쪽과 남쪽 모서리만 열려 있다. 그래서 정확히 얘기하면 ㄱ자 평면의 한옥 두 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열려 있는 북쪽 모서리로 나오면 축대 위에 적벽돌 건물이 있고 그 왼쪽에 원두막이 있다. 원두막은 이 곳으로 오기 전 장욱진이 머물렀던 명륜동에 있던 원두막을 잊지 못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두막 안쪽에는 중국 갑골문자 같기도 한 장욱진 특유의 익살스러운 현판이 걸려 있다(위 사진). 현장에서는 가운데 물고기 모양과 오른쪽 집 모양 정도만 알아차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글씨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관어당(觀漁堂)'이라는 글씨를 장욱진이 직접 쓴 거라고 한다.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오두막'이라는 이름은 국문학자 이희승이 작명한 거라 한다. 뭐 고택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가 인문학이요 장욱진이 말하고자 했던 흔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욱진은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고 했단다.
흔히들 건축은 땅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땅 위에 지어진 건축물이 땅의 이야기를 따르고 땅이 그 건축이 담고자 하는 주제를 말해줄 수 있으며, 땅이 그 주제를 보여주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보다 성공적인 건축은 없는 셈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장욱진 고택에 건물들은 일반적이다. ㅁ자 한옥은 그 당시에는 흔한 민가였고 조적조 건물도 건축적으로 특별하지 않다. 게다가 조적조 건물은 지은 지 27년 밖에 안됐다. 그래서 장욱진 고택에서 건축자체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할게 없다. 하지만 한옥과 조적조 건물은 시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품고 있다. 그것도 장욱진이라는 예술가가 함께한 시간을 품고 있다. 건축 자체에 대한 문화재적 판단을 못했기에 경기도도 용인시도 선뜻 문화재 지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과 그 시간이 담고 있는 무형의 내용에 대한 가치를 평가할 능력은 지식의 유무라고 보더라도 '행정적'인 액션(Action)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2007년에 있었던 아파트 재건축에 따른 철거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운동이라는 논쟁이 있고 나서 결국 고택은 2008년 6월 23일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404호로 등록됐다. 그럼 이때까지는 경기도와 용인시가 '민원 피하기'를 최고 덕목으로 삼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신조를 따랐다 치더라도 이후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현재 장욱진 고택을 인터넷에서 찾으려면 '장욱진 미술문화재단'을 검색해야 한다. 문화재 의미가 짙은 '고택'도 전시시설 의미가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아닌 '재단'이다. 장욱진 고택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2008년은 백남준 아트센터가 개관한 해이기도 하다. 두 장소는 차로 고작 15분 떨어져 있다.
경기도와 용인시가 장욱진이 아닌 백남준을 위한 공간에 더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장욱진'보다는 '백남준'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뭐 경기도와 용인시가 그런 결정과 행동을 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백남준 아트센터는 괜찮은 공간인가? 백남준 아트센터를 짓는 노력은 참 졸렬했다. 그리고 그 과정도 소모적이었다. (참고. 백남준 Art Center) 사실 용인이라는 '땅'과의 관련성을 보자면 장욱진이 백남준보다 훨씬 밀접하다. 이게 '장소성'아닌가?
"'서울에서 일을 하면 한결 쉽죠. 아마 10배는 쉬울 겁니다. 아버지(장욱진)가 서울에 대한 압박을 싫어해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장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버지의 그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이곳이죠. 그러나 아버지와 연관된 장소에서 아버지의 그림을 간직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 몇 번 떠날까 생각 했어요'
장화백의 큰 딸로서 장 이사는 그 동안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주민과 마찰이 한창 심할 때,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그 현수막을 보고 눈물을 흘렸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버리고 가자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수년간의 마음고생 끝에 등록된 문화재. 그는 '장욱진 고택'이 지역과 밀착된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강조했다.
'문화재로 등록됐지만 아직 안내 표지판이 없어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용인시의 무관심이 안타까워요. 하지만 어렵더라도 문화적 활동을 과감하게 시도해야 용인시민들은 물론 국민들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용인시민신문-
용인시와 달리 다른 지자체에서는 '장욱진'이라는 컨텐츠에 관심을 가졌다. 우선 장욱진이 12년간 두 번째 시기를 보낸 덕소가 행정구역내에 있는 남양주시가 2010년 3월 장욱진 유족 측에 미술관 건립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다(-'작가 이름 딴 미술관 건립 붐, 연합뉴스, 2010.03.24-). 장욱진의 고향인 연기군도 미술관 건립을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기군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지정되면서 땅값이 폭등했고 결국 무산됐다. 결국 2010년 4월, 양주시가 2007년부터 추진해온 천경자미술관이 업무추진 과정상에서 문제가 생겨 중단됐고 이후 양주시-장욱진미술문화재단-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건립 협약식'을 가짐으로서 장욱진으로 시립미술관의 컨텐츠를 바꾸게 됐다.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은 2014년 최페레이라의 설계로 준공됐다.
장욱진 고택을 향하면서 우리 식구가 의도한 한적함, 봄 꽃 그리고 아이가 맘놓고 뛰어다닐 수 있는 시간은 모두 충족됐다. 더불어 고택 이곳저곳을 손보는 장욱진의 사위와 딸 그리고 마당 한켠에서 아이를 보며 웃으시는 미망인까지 한 번에 만나기도 힘든 그의 식구들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뭘 보겠다고 눈에 힘을 주기보단 고택 이곳저곳을 거닐며 그 장소에서 장욱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무엇을 바라 봤을까? 라는 상상을 했다. 고택이 있는 땅이 장욱진을 담은 시간을 공유하기에 가능한 상상이었다. 찻집에 앉아 대추차와 커피를 마시며 비치된 장욱진 도록을 살펴봤다. 그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심플하고 익살스러웠다. 아이도 마치 자기 또래가 그린 그림을 보는 듯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대했던 반응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이도 나도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엽서세트와 그의 일생을 다룬 동화책 한권을 샀다. 엽서 중 '나무와 새(1957)' 그림이 있는 엽서는 지금도 회사 내 책상 옆에 꽂혀 있다. 그리고 '자동차가 있는 풍경(1953, 아래그림)'을 비롯한 나머지 엽서들은 그때 아이의 책상 앞에 붙여줬다. 흘깃흘깃 잠깐이라도 아이가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