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놓은 대통령은 몇몇 지인들을 위해 일했다. 그녀가 일해왔던 자취를 보면 정말 그녀가 생각이 있는 인격체인지 의문이 갈 정도다. 그녀를 전면에 내세운 지인들은 기업을 상대로 후원금을 받았다. 그녀의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낸 업체들은 검찰조사와 국정조사에서 피해자 입장이 되길 희망했다. 기업들이 피해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판단은 그 기부금에 대한 대가성이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핵심이었다. 검찰 조사결과 몇몇 기업은 피해자 입장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은 자신들에게 득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우선은 우리의 시스템을 사상누각에 올려주신 대통령(大統領)과 이를 이용한 지인들이 문제이겠지만 그들에게 후원금 명목으로 돈을 가져다 받친 기업에게도 책임은 있다. 이 투명하지 못한 연결고리 속에서 그 기업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쏟아지는 그들의 연결고리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박사였다.
유일한 박사는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장남이었다. 참고로 막내는 유특한 회장으로 유유제약의 설립자다. 1905년 10세의 나이에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가 및 경영활동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설립일은 1926년 12월 10일. 2016년, 유한양행은 설립 90주년을 맡았다. 당시 유한양행이 처음 설립된 곳은 종로2가 덕원빌딩이었다. 그러다 1936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한 뒤 초대 사장으로 유일한 박사가 취임했고 이때 부천시 소사면에 소사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된 상태로 유일한의 활동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결국 193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기업활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한국에 없던 1942년, 유한양행 본사는 소사공장으로 이전됐다.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은 부천시 소사구 성주로 222에 있었는데, 작년 2월 철거됐다(일제와 6.25 버텨낸 '소사공장'... 무관심으로 사라졌다. 중부일보, 2015.7.9). 다음 로드뷰를 통해 2010년 5월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위 다음 로드뷰 참고). 유한양행은 소사공장을 1967년 Pearl C.Buck에게 기증했고 사회사업기구인 Peral Buck재단은 그 건물을 구호시설로 사용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유일한이 한국에 다시 돌아온 시기는 1946년 7월로 광복 이후였다. 유한양행의 재정비는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유한양행이 소사공장을 세웠던 그해 그와 가족들이 지내기 위한 별장도 지어졌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던 상황으로 인해 그는 준공 직후 그 별장을 사용하지 못했고 준공 10년 뒤부터 그의 사저로 사용했다. 건물이 등기된 날짜는 1939년 12월 23일이라고 하니 올해(2016년) 기준 공식적으로 77년 됐다(비공식적으로는 80년). 그럼 유일한은 왜 이곳에다 자신의 별장이든 사저든 어떤 형태로든 지낼 집을 지었을까? 같은 해에 지었다는 사실로 보면 소사공장과 그의 별장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두 시설을 그가 오갔다고 보기에는 조금 멀다. 공장과 별장은 직선거리로 4.05km 떨어져 있는데 지금도 차로는 15분, 도보로는 1시간 20분 가량 걸린다. 소사공장과 별장 건립 이후의 행적을 조금 더 살펴보면, 1964년 유일한은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그의 별장 서쪽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했다. 그의 사후 6년이 지난 1977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 서쪽으로 유한공업전문학교(現 유한대학교)도 설립됐다. 그의 별장이 지어질 당시 이 건물 주변에 유한양행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의 별장과 유한재단 학교를 이 일대에 지은 것으로 봐서 그는 기업 외 사회교육사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이곳을 택했던 것 같다.
↑-구두인관 주변 위성사진(2015년 Version)
↓-구두인관 주변 위성사진(1972년 Version)
현재 이 건물은 ‘유일한의 별장’, ‘유일한의 사저’가 아닌 ‘구두인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특이한 이름을 달게된 사연은 이렇다. '구두인관'에서 집을 의미하는 '館'을 제외한 '구두인'은 'Goodwin'을 발음나는대로 쓴 것이다. 결국 '구두인관'은 'Goodwin House'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럼 Goodwin은 누구일까? 건물 앞에 설치된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The Reverend Dr. Charles Goodwin이 풀 네임(Full name)이다. 1913년 미국 Connecticut州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는 이듬해(1961년)부터 1978년까지 연세대학교와 성미가엘신학원 교수로 재임했는데, 성미가엘신학교가 현재 구두인관을 소유하고 있는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이다. Charles Goodwin은 1997년 향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무덤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있다. 이 건물에 그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그의 희생과 믿음을 기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Charles Goodwin이 이 건물을 이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건물이 지어진 계기와는 상관이 없게 된다. 1956년 11월 10일 유일한의 딸인 유재라 여사는 이 건물과 부지를 성미가엘신학원에 매각했다.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일대 가장 오래된 항공사진(1972년)을 보면 경인로와 연동로의 선형은 지금과 비교했을때 변하지 않았다(위 두 위성사진 비교). 구두인관은 이 일대 건물 중 매스가 가장 컸고 구두인관 동쪽으로 건물 몇 채가 ⊃자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위 1972년 위성사진 참고). 이 건물들은 성미가엘신학원의 시설들로 추정된다. 구두인관 서쪽 연동로 건너편에는 一자로 긴 매스 두개가 나란히 배치된 유한공업고등학교가 보이고 유한대학교는 설립 전이었다. 구두인관으로 이전하기 전 성미가엘신학원의 행적을 살펴보면, 1914년 강화도에서 개교한 뒤 1921년 5월 인천으로 이전했으나 신사참배 및 정치적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1940년 3월 강제 폐교됐다. 1914년 강화도에 개교한 성미가엘신학원은 현재 성공회 강화성당(Mark N.Trollope & Charles J.Corfe, 1900)이 있는 곳이었고 1921년 5월에 인천으로 이전한 곳은 중구 내동에 있는 성공회성당(1956) 인근이었다. 1952년 4월에는 인천에서 청주로 학교를 이전했다. 아마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위치는 현재 청주 성공회성당(Cecil Cooper, 1935)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구두인관 매입 후 1961년 4월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성공회신학대학으로 최종인가를 받은 시기는 1992년 2월, 다시 '성공회대학교'로 교명을 바꾼 시기는 1994년 9월이었다.
↑-성미가엘신학원 위성사진(1972년 Version)
↓-성공회신학대학 위성사진(1978년 Version)
그럼 성공회대학교에서 구두인관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1961년 4월 구로구 항동으로 이전을 완료한 뒤 구두인관은 성미가엘신학원 건물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다 1972년 위성사진 상에서 구두인관 남동쪽 맞은편에 보이는 一자 평면 건물이 성미가엘신학원의 주요한 건물로 바뀌었을 것 같다. 이 건물은 1994년 위성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아래 위성사진). 1978년 위성사진을 보면 구두인관 남쪽으로 둔각으로 꺾인 ㄴ자 평면의 건물이 들어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구두인관은 한때 신학원장의 사택과 1970년대 이후에는 집회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1973년~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의 산실이기도 했다. 위 두 위성사진 사이 기간에 구두인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아래 1994년 위성사진을 보면 성공회신학대학 캠퍼스가 남쪽으로 └┘자 평면 건물 세 동 -승연관, 일만관, 월당관(모두 아키플랜 증축설계)- 이 들어서면서 확장됐다. 현재는 이 세 개동 남쪽으로 네 개동 -열림관, 이천환기념관(舊 종합관, 김석철&Archiban건축, 1997), 성베드로학교, 미가엘관- 이 더 세워졌다.
↑-성공회신학대학 위성사진(1994년 Version)
↓-성공회대학교 위성사진(2003년 Version)
위 2003년 위성사진을 보면 1978년부터 보였던 구두인관 남쪽에 둔각으로 꺾인 ㄴ자 평면의 건물과 1972년부터 있었던 一자 평면 건물이 없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 전까지 캠퍼스 북쪽 끝에서 건물 사이로만 보였을 구두인관이 전면에 드러나게 됐다. 또한 구두인관 동쪽으로 새천년관이 준공(아키플랜 설계, 2000)되면서 중앙도서관-성미가엘성당/피츠버그홀이 ㄱ자 평면을 이루게 됐다(연면적 36,037㎡). 아키플랜이 새천년관 설계와 함께 성공회대학교의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2003년 캠퍼스 변화를 통해 구두인관이 정문에서 캠퍼스의 역사를 드러내는 얼굴이 됐다.
물론 구두인관에 이렇게 중요한 역할이 맡겨졌다고 생각하기에는 건물의 유지보전 상태는 아쉽다. 서쪽 연동로로 난 주출입구의 문은 큰 고증없이 새로 설치됐고 필요에 따라 군데군데 놓인 에어컨 실외기도 보기 거슬렸다(위 사진). 무엇보다 그 활용용도가 법인사무국, 인문학습원, 평생학습연구소, 산학연구원이라고 하니 캠퍼스의 얼굴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내부로 들어가보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안내판에 따르면 내부공간에서는 한옥의 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며, 외부에서는 4개의 굴뚝이 보이지만 내부 벽난로는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한다.
구두인관이라는 역사적 건물을 두고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과 연세대 및 성공회대학교 교수였던 Charles Goodwin 목사가 연결돼 있다. 하지만 지금 그 건물이 '구두인관'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 비중은 Charles Goodwin과 성공회대학교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다. 역사적 건물을 무조건 문화 및 전시시설로 활용하는 데는 회의적이지만 구두인관 만큼은 유일한과 Charles Goodwin이라는 인물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서 우선 근대건축물이 있을거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구로라는 지역에 있는 근현대건축물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유일한과 Charles Goodwin 나아가서는 유한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의 역사를 '교차하며' 담아내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역사적 건물을 문화 및 전시시설로 활용하는 다른 사례와 달리 구두인관은 이 두 인물과 두 학교를 '교차해서' 보여준다는데 차별점이 있을 수 있다.
두 인물 모두 미국에서 자라 한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주 활동기간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로 상이했다. 한 사람은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다른 사람은 종교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 교육사업에 기여했다. 공간적으로도 구두인관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는 남쪽으로 확장돼 있고 유한재단 학교들은 서쪽으로 확장돼 있다. 구두인관 가까이에 유한공고 내 유한동산과 유재라홀이 있고 유한대학교 내에는 유일한 기념관과 유재라관이 있다. 모두 구두인관이자 동시에 유일한 박사 별장이라는 역사적 건물로 묶일 수 있는 시설들이다. 문제는 하나의 공간에 두 인물과 두 학교의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두 학교가 잘 협의해야 하는데, 성공회대학교와 유한재단이 그럴 수 있을 만큼 친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