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이었던 것 같다. 친구가 남산자유센터웨딩홀(現남산제이그랜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비가 왔었는데 몇 개의 결혼식이 겹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도판으로만 봤던 자유센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유센터 어디에도 흑백도판 속 콘크리트 덩어리가 만들어내는 원형의 감동은 없었다. 건물에 칠해진 연한 녹색은 한심스러워 보였고 북쪽 전면 기둥사이에 놓인 컨테이너는 '굳이 저렇게 까지...'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아마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더 감상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한참 후 다시 찾았을 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의 자유센터는 조금 나아 보였다. 아마도 하늘을 향해 치켜든 지붕과 그 아래 열주공간의 회랑 등이 만들어 내는 굵은 명암이 더 강하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자유센터 하면 으레 등장하는 도판에서 보여지는 회색 콘크리트가 자아내는 원형의 감동은 여전히 없었다.
사실 자유센터는 완공 직후 지금까지 그렇게 큰 변형이 없었다. 가장 큰 변형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남쪽 입면에 끼워진 유리창이다. 특히, 남쪽 입면에서 서쪽 두 번째와 네 번째 베이Bay에는 나름 아치Arch로 입면을 분할한 프레임Frame과 그 사이에 유리가 끼워졌다(위 사진). 이에 반해 남쪽 입면 동쪽 두 번째와 네 번째 베이는 움푹 들어간 원상태로 원형 개구부가 뚫린 돌출된 지붕을 여전히 볼 수 있다(아래사진에서 오른쪽). 이 외 준공당시와 비교했을 때 변화된 점은 노출콘크리트 외벽에 칠해진 페인트다. 그런데 '노출콘크리트 위에 칠해진 페인트칠'은 자유센터에서 만큼은 거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변화다. 왜냐하면 자유센터는 노출콘크리트 덩어리 자체가 기념비였기 때문이다.
김수근에게 남산은 분명 인연있는 공간이었다. 1959년 그가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계기가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응모를 통해서였다(위 모델링 사진). 물론, 실제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5년 뒤 자유센터 건립시 국회의사당 현상공모에서 제시됐던 많은 생각들이 일부 실현됐다. 자유센터가 1962년 11월 부터 공사를 시작해 1964년 완공됐고 실제 설계는 1962년부터 1963년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김수근은 32세에 자유센터를 설계했다. 올해(2017년) 2월 20일은 그의 86번째 생일이다. '천재'라는 인물의 등장이 쉽지 않은 건축계에서 35세가 되기도 전에 김수근이 자유센터와 같은 국책사업 설계를 맡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권력밀착형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계기는 1961년 완공한 워커힐호텔內 힐 탑 바Hill Top Bar(아래사진)와 더글라스 하우스Douglass House였다. 워커힐 호텔은 권력집단을 위한 시설이었고 그런 시설을 형태적으로나 질적으로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설계했기 때문에 그들은 김수근을 계속 찾았다.
시기적으로도 좋았다. 당시 권력계층이 됐든 누가 됐든 해외여행은 쉽지 않았고 근대건축의 거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채널Channel도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수근이 일본이라는 공간에서 도판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근대건축 거장들의 작품은 자신의 건축언어化 하기에 아주 좋았다. 게다가 그는 어떤 건축물이 권력자들에게 어필appeal하기 좋은지를 아는 영리한 건축가였다. 실제 1960년대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근대건축의 거장들이 설계한 건축물 중 형태적으로 특이한 그래서 눈에 띄기 좋은 사례들과 닮아 있었다. 힐 탑 바는 Richard Neutra를, 자유센터는 Le Corbusier의 Chandigarh 주의회청사와 유사했다. 김수근의 재능을 인정한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김수근이 자유센터 설계당시 '반공연맹 건설분과 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건 그가 건축가로서 자유센터 건립에 단순히 설계를 통해서만 관여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정인하에 따르면 '김종필은 김수근이 건축활동을 하면서 마주쳐야만 했던 현실적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해결해 주었으며, 그를 매개로하여 김수근은 제3공화국의 상당수 고위정치인들과 친분을 도모할 수 있었고 1960년대의 공공건물의 수주는 대부분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김수근 건축론, 한국건축의 새로운 이념형, 정인하, 시공문화사-)
연면적 9,883㎡ 규모의 자유센터는 국가보조금 1억원과 국민 성금 1억5천만원이 투입된, 당시로서는 거액의 국가사업이었다. 시설의 구성은 국제회의장, 반공연맹 본부사무국, 숙소, 도서관 등으로 이루어진 컴플렉스Complex였다. 시설 건립을 통해 대한민국은,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박정희 정권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반공국가의 종주국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설 건립을 위해 1962년 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기금에서 한국전쟁 참전국들이 내기로 한 분담금이 걷히지 않았다. 솔직히 참전국 입장에서 돈을 낼 필요나 이유가 있었겠는가? 결국 계획 당시 의도했던 시설에서 반공연맹 본부 사무국(자유센터)과 숙소를 위한 고층부 건물(자유회관)만 지어졌다. 그나마도 17층 높이의 자유회관은 골조공사만 이루어진채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국제회의장은 실시설계까지만 이루어진채 실제 지어지지 않았다.
계획대로 지어지지 못했다는 데에서부터 자유센터가 의도하고자 했던 건축적, 공간적으로 기념비가 되려했던 목적은 실패했다. 메세지를 온전히 전달하는데 실패한 기념비는 이제 잊혀진, 뭘 얘기하려 했는지도 망각된 오브제Objet가 됐다. 골조공사만 진행돼 있던 자유회관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광공사가 매입해 타워호텔Tower Hotel이 됐다. 이후 타워호텔은 간삼 파트너스의 설계로 리모델링 돼 2010년 반얀트리 클럽&스파로 바뀌었다(위 사진). 자유센터는 반공연맹 사무국과 여성 교육단체 및 외국인용 면세점 분점으로 쓰이다 웨딩홀과 자동차 극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드문 노출콘크리트 건물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자유센터의 기념비적 특성을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요소는 연면적의 70% 가량을 차지하는 공용공간, 과장된 곡선지붕, 거대한 조각적인 열주 등이다. 하지만 자유센터의 기념비적 특성은 건축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처음 김수근이 의도한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애초 그 건축물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전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준공 직후 찍은 흑백사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원형의 감동은 그 '순간'만이 유일하게 온전했다. 어쩌면 건축물이 됐든 조형물이 됐든 '기념비'라는 것이 기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거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은 그 대상을 기념하고자 하는 그 순간의 사회적, 정치적, 시대적 상황 하에서만 기념하기 원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근이 Le Corbusier의 작품을 베껴왔든 아니면 그의 스승인 요시무라 준조의 영향을 받았든 1964년에 자유센터와 같은 건물을 이 땅에 심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게다가 아무리 모방했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지금과 같은 조형미를 뽑아내 -뭐가 됐든- 건축물 자체로 뭔가의 분위기를 표현해 냈다는 건 그가 탁월한 심미안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원형이 바뀐 지금도 자유센터 곳곳에서 김수근의 노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쪽에서 바라보면 자유센터는 조형적이지도 거대하지도 않았다. 물론, 입구 상부에 올려진 곡선진 캐노피Canopy와 건물 위로 치고 올라간 기둥들에서 나름의 조형미가 느껴진다. 나중에 덧붙여진 유리입면이 없다고 가정해 보면 건물 매스가 만들어내는 음영은 지금보다 훨씬 다이나믹Dynamic하게 느껴졌을 듯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장면(위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은 거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자유센터의 남쪽 방향을 보여주는 도판은 흔하지 않다. 아마도 자유센터가 건립된 목적 -반공국가의 종주국으로서 대한민국- 을 이 방향에서 보여지는 모습에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북측 입면에서 바라본 자유센터는 지붕 아래 매스 높이만큼 하늘로 치고 올라간 지붕형태가 압도적이다. 이 지붕이 건물의 인상을 결정하는데 워낙 큰 영향을 미치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자유센터라는 건축물 자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세지가 있기에 우선 나올 수 있는 해석은 당연히 '기념비적 특성'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반공국가의 종주국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메세지 외 자유센터가 전달하고자 했던건 무엇이었을까? 정인하에 의하면 '자유센터는 한국에서 전후 최초로 지어진 국가차원의 기념건축'으로서 '권위주의적인 군사문화와 반공이념으로 대표되는 이념, 군사정권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정당화하는 역할, 군사정권이 갖는 권력의 정당성과 지배계급이 갖는 이데올로기, 즉 경제 제일주의를 통한 국력의 신장과 반공주의, 그리고 민족감정을 건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센터의 건축요소들은 실제 필요한 기능보다 훨씬 강하게 부각되기 위해 스케일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해석은 남산이라는 대지와 건축물간의 관계다. 공간지SPACE 2002년 12월호(통권505)를 보면 '거대한 곡선 캐노피는 대지 조건을 근본적인 전제로 삼아 높아진 입면을 반영한 것'으로 이를 통해 '인간적 스케일Scale로 다듬은 기능적 정면성(남쪽 입면)과 기념비적 스케일의 상징적 정면성(북쪽 입면)을 동시에 획득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자유센터 건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계획위원 중 한 명이었던 김점곤(1923년生)은 《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 자유센터 건립이야기, 공간사》에서 '뒷산(남산)의 비탈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기와의 선을 뒷산의 비탈선에 맞추어 비스듬히 지은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당시 한국에서는 주목받는 건축이었고, 이 건물과 다른 건물을 합하여 김수근 선생이 태평양건축상을 수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부분에서 함께 봐야 하는 것이 남북을 관통하는 중앙계단과 로비다. 왜냐하면 건축이라는 건 구축을 하는 행위이고 구축은 하나의 장치로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건축은 여러 요소들이 모여 궁극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기에 북측 입면에 올려진 지붕만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건 조금 편협해 질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공간지(-SPACE 2002.12-)에서는 '중앙 계단과 개방된 로비가 인간적 스케일과 기념비적 스케일을 지닌 두 정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주는 것만이 역할의 전부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유센터가 어떤 메세지가 됐건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은 '권위'였다. 그리고 권위적인 기념비를 만들기 위해 위압적인 공간을 연출해야 했다. 북측 입면에 올려진 지붕을 통해 우리는 하늘로 상승하는 자유를 느낀다기 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장된 액션Action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중앙계단으로 가까워질수록 심해진다. 이유는 땅이 갖는 경사도라는 제약조건도 있겠지만 지붕에 비해 건물 몸체가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로 상승하는 매스를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거대한 매스가 기단부의 몸체를 누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지붕을 받치는 몸체에서 돌출된 기둥이 원기둥이나 각기둥이 아닌 얇은 판으로 그것도 조형적인 곡선을 하고 있기에 몸체가 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고는 있다.
건물이 품어내는 '권위'는 계단을 통해 로비로 접근하는 과정 상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 지붕 높이로 인해 층계참 아래층을 오르는 동안에는 개방감이 완전히 사라진다(위 사진). 1개층을 오른 계단은 일정 길이의 층계참을 만난다. 층계참은 지붕 아래 공간으로 여기서 층계참 아래를 동서로 지나가는 통로를 볼 수 있다(아래사진). 통로는 지붕에 뚫린 연속된 원형 개구부와 열주로 인해 장엄하다. 자유센터가 기념하고자 하는 바를 공감하기 위해 계단 한개 층을 오른 이에게 보내는 장엄함이다.
계단을 다 오르면 건물 한가운데 배치된 로비에 이른다. 지금은 남쪽 개구부에 유리가 끼워져 있지만 완공당시 이 개구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비 남쪽 입구로 걸린 캐노피는 프레임 중간에 걸린 구조체 였을 뿐이다. 로비에는 남북으로 뚫린 개구부와 그 사이 한쪽에 상부 3개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솟아 있다(위 사진). 준공 당시처럼 개구부에 끼워진 유리와 프레임이 없다고 상상해 보면, 로비는 건물 지붕 아래 공간이지만 동시에 외기에 바로 면한 반Semi외부공간이다. 솟아 있는 개방된 계단은 로비에 상승감을 주고 남북쪽 개구부는 시야를 한없이 확장시킨다. 구체적으로 남쪽 개구부를 통해 바라보면 17층 높이의 자유회관Tower Hotel이 남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고, 북쪽 개구부를 바라보면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아래사진). 모든 장면은 공산주의에 반대한(反共) 국가들 中 종주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이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지도자의 특월한 리더십Leadership을 통해 종전 10년도 안 된 준공 시점에 강대국으로 발돋음하고 있다는 메세지다. 그런데 이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공정한 입장일까? 베이징 자금성의 외성 정문인 영정문에서 권력의 핵심인 태화전까지 이르는, 외국 사신의 진을 빼는 접근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유센터 북쪽 정면에서 중앙계단을 통해 로비로 이르는 과정은 로비에서 보이는 장면을 통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조금 더 정치적인 극화를 덧붙이자면 이 과정을 통해 로비로 오르는 사람을 맞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최고권력자가 되겠지만- 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남쪽 출구 앞을 통해 로비에 서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자유센터 '북측 입면-중앙 계단-로비'로 연결되는 과정의 전前 단계가 더 있을 수 있다. 그 전 단계가 앞서 언급한 중앙계단 층계참에서 보는 열주공간이다. 열주공간이 주는 스펙터클Spectacle함은 층계참이 아닌 대지 레벨에 서면 더 강하게 느껴진다(위 사진). 그런데 자유센터로 접근하는 동선을 생각해 보면 이 열주공간을 반드시 지나칠 필요는 없다. 남산이라는 입지를 생각하면 자동차를 타고 자유센터로 온다. 자유센터 서쪽을 지나는 장충단로와 연결되는 입구로 들어온 자동차는 북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끝이다. 이용자는 거기서 중앙계단을 통해 남쪽으로 올라오면 된다. 그렇다면 김수근은 열주공간에서 무엇을 의도했을까? 아래 김수근의 스케치를 보면 자동차가 열주공간을 내달리고 있다. 마치 미래도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장면이 실제 펼쳐지려면 서쪽 입구로 들어온 자동차는 열주공간 아래를 서에서 동으로 관통한 뒤 동쪽 기둥 사이를 통해 북쪽 주차장으로 ┘자로 꺾어야 한다. 층계참 아래에서 이용자가 자동차에서 내린다 하더라도 이용자는 중앙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거슬러 간 뒤 계단을 올라야 한다. 동선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수근의 스케치대로 동선이 이루어졌다면 앞서 언급한 북측입면-중앙계단-로비로 연결되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 지나야 하는 열주공간은 충분한 역할을 했을 듯 하다.
애초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김수근의 건축언어에 모든 것을 기댄 기념비였다. 그렇다면 이 기념비가 기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퇴색된 지금, 이 공간에 남은 건 건축가의 작품세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준공 시점에서 변형된 부분을 걷어내 원형을 살린다면 자유센터는 김수근 기념관이 되기에 참 좋은 공간이다. 자유센터가 김수근 기념관이 될 수 없다면 그 다음으로 자유센터라는 건축물 그리고 그 공간과 어울리는 컨텐츠는 '박정희'다. 비록 김수근을 총애한 사람은 박정희가 아닌 김종필이었지만 그도 김수근이 만들어내는 공간이 자신의 윗사람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했기에 김수근을 계속적으로 고용했을 것이다. 김수근은 박정희 시대에 공감했던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모습으로 기념비가 될 수 있는 자유센터를 설계했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관은 이곳이 아닌 상암동 디지털 미디어 시티에 개관했다(설계자 모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사진을 통해 본 박정희 기념관은 최근 지어지는 주민센터 처럼 보인다. 현재 자유센터에서는 박정희의 흔적 보다 이승만의 동상을 볼 수 있다(아래사진).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시기는 2011년 8월 25일이다. 최근에는 현재 이 건물을 쓰고 있는 '한국자유총연맹'은 태극기 집회를 진두지휘하는 조직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뭐 이런 저런 생각에 자유센터의 치솟은 지붕을 쳐다보고 있는데, 평일임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려 자유센터로 들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들이 내린 버스를 보니 외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 손님이었다. 한류열풍이 워낙 뜨겁다 보니 동남아시아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자유센터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러 오는 것이었다. 자유센터 웨딩홀 입장에서도 예식이 없는 주중에 수입원이 될 수 있으니 좋고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사 입장에서도 버스 주차하기 편한 곳을 이용하니 득得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택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산국가(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의 국민들이다. 자유센터 건립당시 반대의 대상이었던 공산국가(反共) 국민들이 이제는 관광차 방문한 대한민국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자유센터를 찾는 상황이다.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은 자유센터를 어떻게 볼지 궁금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