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다 보니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책'만큼 절대적으로 우선시 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책 축제'는 여러 지방 자치 단체에서 하는 축제 중 하나다. 내가 사는 동네도 매해 9월이면 책 축제를 연다. 유네스코UNESCO는 1995년 총회에서 '독서 출판 장려와 저작권 제도를 통한 지적 소유권 보호 증진'을 위해 '세계 책의 날'을 제정했다. 영어로 표기하면 'World Book and Copyright Day'다. 날짜를 4월 23일로 결정한 이유는 스페인 카탈루냐Catalonia지역의 '세인트 조지의 날St. George's Day'에서 유래한다. 이날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를, 여자는 남자에게 그 답례로 영원을 상징하는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다 1923년 서로 책을 주고 받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유는 서적상들이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에 세상을 뜬 미구엘 세르반테스Miguel Cervantes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를 기념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서적상들이 카탈루냐 지역과 어떤 연고도 없는 두 작가를 소환시킨 것을 보면 상품 판매를 위해 여러 기념일을 지정하는 현재 상황도 뭐 크게 다를 것은 없는 듯 하다. 판촉을 위한 대상이 '책'이라면 상관 없나? 어찌됐든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 책 축제를 여는 각 지자체에서는 이 날에 맞춰 여러 행사를 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전이라 하는 책을 대충이라도 읽어본건 고등학교 졸업 이후였다. 그나마도 긴 통학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등하교와 이후 출퇴근 시간에 서서히 책을 읽게 됐다. 다행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책 읽은 습관이 잡혀서 방글이도 암묵적인 독서시간에는 별 군소리 안하고 자기 책을 읽는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신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으면서 자식들은 책을 즐겨 읽기 원한다. 자기들은 TV앞에 앉아 있으면서 자식들에게 책 보라 하는 말은 참 무책임하다. 이런 이상한 현상을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책과 지식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성공'이라는 관계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대한민국 성인 50%, "독서는 성공의 열쇠다"', Book DB, 2016.10.25).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성공 (혹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 아들, 딸은 더 성공했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 그냥 책 읽는거 자체를 즐겁게 생각하게 하면 좋을 텐데.
연간 평균 독서량이 9.2권에 불과함에도 우리나라 부모들의 책에 대한 사랑은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현재 자신이 사는 집이 아닌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이라는 단서하에 품는 희망이다. 마치 '경제적 여유가 더 생기면',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더 생기면'이라는 죽을때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과 같은 그 단서 때문에 자신만의 서재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다. Edwin Heathcote는 '집을 철학하다(The Meaning of Home, 아날로그)'에서 '책은(혹은 책의 부재는) 한 사람의 관심사와 개성을 비추는 거의 완벽한 거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재와 서가를 통해 그 집 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Edwin Heathcote의 주장을 빌리자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이라는 단서는 결국 '나만의 서재 만들기를 위한 나만의 관심사와 개성이 현재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서재를 만들 만큼 책을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는 편이고 정말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만 산다. 책의 총량도 책장 하나로 정해 놓고 수용 용량을 넘은것 같으면 되팔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서재를 꾸미고 싶다는 욕심이 없다. 다만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책이 채워져 있는 공간이라면 나만의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이 있다. 바로 파주 헤이리에 있는 '한길 북하우스'다. 북하우스를 기획한 사람은 한길사 대표 김언호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재미있게 읽은, 그래서 이런 책 꼭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를 출판한 회사다.
김언호는 헤이리를 기획하고 실현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열화당 이기웅과 함께 파주출판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북하우스는 헤이리 기획의도의 정수精髓라 봐도 좋을 공간이다. 설계자도 '헤이리 기본설계지침'을 만든 김준성이다(다른 한 명은 김종규).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책이 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 -도서관, 책방콘서트, 미술전시, 강좌, 신나는 장치 등- 의 문화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Space 200408-). 자신만의 건축을 '협업 자체'라고 생각하는 김준성 답게 북하우스 설계는 미국 건축사무소 SHoP과 함께 했다. SHoP의 크리스토퍼 샤플즈Christopher Sharples와 김준성은 콜럼비아 건축대학원 동기다.
김준성이 수립한 '헤이리 기본설계지침'에 따르면 북하우스는 '패치-바Patch-Bar유형'이다. 이 유형의 건물들은 '주로 마스터플랜에서 계획된 길을 포함하는데 패치 위의 건물들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 있게 되며, 이러한 사이공간에 있는 길은 차도라기 보다는 사이공간이 형성하는 외부공간의 한 부분이 된다.' 또한, '평면상으로 자연과 인공물과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각각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함과 동시에 이러한 두 요소가 긴밀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하는 각 필지에서의 단면계획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단지에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사람과 자연과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설명돼 있다(-건축과 환경 200210-).
북하우스의 대지는 헤이리를 둘러싸는 6개의 언덕 중 단지내로 가장 깊숙히 들어와 있는 언덕 남쪽이다(대지면적:4,235㎡). 즉, 북하우스 대지를 중심으로 언덕과 평지가 만난다. 이러한 여건을 감안하여 설계자는 두 개의 긴 바Bar에서 설계를 시작했다. 그 중 평지(남쪽)에 대응하는 매스는 전시공간과 카페가 있는 커다란 홀Hall이며, 언덕(북쪽)에 대응하는 매스는 책으로 채워져 있는 북 바Book bar가 된다. 그리고 그 두 매스를 경사로Ramp가 연결한다(연면적:1,639㎡). 경사로는 1층 전시판매장에서 시작돼 2층 한길사책방을 거쳐 3층 휴게실까지 연결된다. 하지만 단순한 건물의 수직동선 공간은 아니다. 경사로는 3층 높이의 벽을 가득채운 책의 숲을 비집고 나아가는 오솔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 경사져 있으니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집어들고 어디에서든 걸터 앉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3층 휴게실에서 경사로는 옥상에 조성된 옥외공간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간 경사로는 북하우스 뒷편에 있는 언덕으로 연결되는 숲길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나라의 랜드스케이프 건축Landscape Architecture 대부분이 그렇듯 북하우스에서도 휴게실에서 옥상으로 나가는 출입문은 잠겨 있다.
북 바를 이루는 책장과 경사로는 '책의 숲'과 '나무의 숲', '책 숲을 나아가는 오솔길'과 '언덕으로 이어지는 숲 길', '서재에서 생활로 나아가는 독서 체험'이라는 은유적 대응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장은 북하우스를 구조적으로 지탱하고 경사로는 북하우스가 담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주변 풍경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동선이다. 여기에 더해 건물 전면을 덮고 있는 이페Ipe 나무막대기는 외부에서는 파사드Facade를 넘어 옥상으로 연결되고 내부에서는 책장이 된다. 실제 구조적인 역할은 없지만 마치 책장이라는 나무기둥에서 뻗어 나간 나무가지 같다. 이페 나무막대기가 나무가지 같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나무막대기 사이로 낯에는 빛이 실내로 들어오고 밤에는 밖으로 발산되는 장면 때문이다. 온그라운드 갤러리(Onground Gallery, 조병수&BCHO, 2013)에서 생각난 일본어 '고모레비こもれび'가 이 장면에서도 떠올랐다(위 사진).
어떤 측면으로 봐도 북하우스의 중심은 책으로 가득 채워진 책장이다. 북하우스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책은 모든 문화예술의 기원이자 마지막 성과다. 모든 문화예술은 한 권의 책으로 발단되고 한 권의 책으로 귀결된다. 북하우스는 바로 책의 이같은 논리와 가치, 미학과 권능을 그 내외부 공간에서 실험해보자는 것이다.' 북하우스에서 즐거워하는 방문자들을 보면 한길사 대표 김언호의 실험은 성공한 것 같다.
북하우스는 2004년 준공됐다. 그리고 2005년 2월 북하우스 북쪽 대지에 부속건물 설계가 시작됐다(대지면적 4,751㎡). 처음 부속건물의 프로그램은 다실茶室이었다. 하지만 건축주가 1892년에 발간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책 '귀네비어의 변명The Defence of Guenevere and Other Poems'과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책 '고딕양식의 본질The Nature of Gothic'을 구입하면서 이를 위한 전시공간으로 바뀌었다. 두 책 모두 윌리엄 모리스의 책 공방인 캠스콧 프레스Kelmscott Press에서 간행됐다. 2005년 11월 설계가 끝난 한길책박물관(舊 윌리엄 모리스관)은 2007년 1월 개관했다.
Bill Risebero는 '건축의 사회사Modern Architecture and Design(열화당)'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근대 자체를 증오한 사람으로서 중세적 유토피아 같은 사회를 만들려는 가당치 않은 일에 집착했으며, 더 많은 대중에게 예술을 향유케 하려는 그의 시도가 좌절된 것은 기계생산에 대한 그의 편파적인 증오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통념을 언급하며, 그러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Bill Risebero는 윌리엄 모리스가 '근대 자체를 증오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힘이 특권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을 증오'했고 '과거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에게 중세는, 평범한 인간이 자신을 뭉개 버리는 자본주의 앞에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보여준, 그리고 이 시대에 다시 한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기계를 증오하기는 커녕 당대 유명한 사회비평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술이 인간을 고역으로부터 해방하고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인식했던 사람이었다' 생각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우리 시대는 과거 사람들이 무모한 꿈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기계를 발명했지만, 아직 이들 기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윌리엄 모리스에게 ''사용'은 사회적 사용, 즉 소수의 이익을 위해 오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준성은 윌리엄 모리스의 책 '각 페이지에 박힌 초서草書타입의 글자보다는 정교하게 프린트된 테두리와 프레임에 주목해 계획 초기부터 건물이 들어설 경계와 건물 자체의 프레임에 대한 설정부터 시작했다'고 했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Space 200705-). 이런 설명보다 북하우스를 시공하면서 훼손된 언덕의 영역내에서 책박물관을 설계했다는 설명이 훨씬 솔직하다.
김준성은 북하우스의 경사로가 외부로 나오는 옥상의 옥외공간에서 책박물관의 동선을 시작했다. 즉, 준공 기준으로 3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북하우스와 책박물관은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돼 있는 셈이다. 북하우스 옥상에서 책박물관의 지하1층(홀과 카페)이 시작되고 주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배치돼 있다. 북하우스에서 시작하면 5층과 6층이다(연면적 883㎡). 책박물관의 매스는 '사각 프레임Frame들이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산자락의 경사 속에 삽입되는 형태에서 출발'됐다고 한다(-Space 200705-). 그래서인지 책박물관의 매스형태는 꾸기적꾸기적하다. 하지만 그 구김살 사이에서 빛이 들어와 전시공간을 비춘다. 그래서 관람 몰입도를 방해하지 않는다. 북하우스에서 책박물관과 언덕으로 연결되는 길도 이 구김살에 만들어져 있다. 물론 접근금지 펜스가 있다.
한길 북하우스와 책박물관을 보면서 히라나 게이치로가 한 '독서라는 행위는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다 읽었을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페이지를 넘기며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앞으로 생활에서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독서라는 체험은 그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라는 주장이 떠올랐다(-책을 읽는 방법, 문학동네-). 가만 보면 책을 읽는 방법에도 트렌드Trend가 있는지 최근에는 정독精讀도 모자라 오독誤讀이 주목받고 있다. 박웅현은 김구용 시인의 글 -'나는 책을 오독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평소에 책을 오독한 덕분이다'- 을 재인용하면서 '책 속의 내용을 저마다의 의미로 받아들여 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각자의 오독'을 하자고 제안한다(-다시, 책은 도끼다, 북하우스-). 우치다 타츠루는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오답자로서의 독창성''이라면서 '어떤 메세지를 어느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이 그 수신자의 독창성과 아이덴티티Identity를 결정짓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스승은 있다, 민들레-). 정독이든 오독이든 두 방법 모두 '읽는다'는 행위보다는 읽음으로서 '나에게 무엇이 남았냐'에 의미를 둔다. 책이 지식을 쌓기 위한 수단 -그럼으로서 성공할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아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는 것 같아 반갑다.
"책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누군가 대중들에게 책을 읽어줬겠죠. 그런데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많이 보급되니까 사람들이 각자 묵독하기 시작합니다. 묵독을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개인화가 진행된 겁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복잡한 조직이 끼어들 틈이 없게 됩니다. 교황이 성서를 읽어주고 설교를 해줄 때에는 교황 개인의 해석이 들어가고 교회의 가치관이 설교의 내용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혼자 읽을 수 있다면 스스로 그 내용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를 두고 개인화가 진행됐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북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