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근대건축가로 꼽히는 김중업은 1922년, 김수근은 1931년 생이다. 김중업은 34세인 1956년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었고 김수근은 30세인 1961년에 김수근건축연구소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당시 건축학과를 졸업했던 건축가 지망생들(1940년대생~1950년대생)은 두 건축연구소에서 실무를 시작했다. 그래서 1940년대생~1950년대생 건축가들의 이력에서 이 두 건축가 중 한 명에게 사사받은 경력이 많다. 당시 두 건축가의 경쟁의식이 강했기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에게 사사받은 건축가는 거의 없다. 아니면 둘 모두에게 사사받은 건축가들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만큼 유명세를 탄 건축가가 없거나. 그런데 이 모든 사항에서 제외되는 건축가가 있다. 바로 김석철이다.
김석철은 1943년생이다. 그는 작년(2016년) 5월 12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김석철은 1966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던 1964년~1967년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이후 1969년까지 김수근건축연구소에 서 실무경험을 했다. 여전히 운영 중인 김석철&아키반 파트너스의 홈페이지를 보면 두 건축연구소에서 작업한 조선호텔(1967)과 여의도 마스터플랜(1969, 위 도면) 같은 프로젝트들이 소개돼 있다. 김석철은 28세가 되는 1971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김석철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3년 후인 1974년, 연구소는 '아키반Archiban'으로 이름을 바꿨다. 꽤 빠른 나이에 독립한 셈이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면 이 시기 수행했던 프로젝트로 서울대학교 관악산 캠퍼스 마스터플랜(1970), 경주 보문단지 마스터플랜(1972), 스웨덴 대사관저(1973), 압둘 아지즈 메디칼 컴플렉스Abdul Aziz Medical Complex(1979), 대구 가든테라스(1980) 등이 있다. 이 중 준공된 프로젝트는 스웨덴 대사관저와 대구 가든테라스다. 그가 수행한 여러 프로젝트 중 그래도 현재의 그를 있게 한 프로젝트는 단연 '예술의전당'이다. 흥미로운 건 <예술의전당 국제지명현상설계>에서 김석철은 자신이 건축을 사사받은 김중업과 김수근과 경합해 당선자로 선정됐다는 것이다.
1984년 12월 《월간 건축문화》를 보면 응모작은 당선된 김석철 외 김수근, 김중업, T.A.C 그리고 C.P.B였다. 건립목표는 관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공공시설 답게 꽤 긴 한 두 문장인데, 다음과 같다. "문화예술의 국민적 확산은 온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문화활동에의 참여 기회와 그 혜택의 범위를 넓히는 문화복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예술공원(Cultural Theme Park)」이라는 독특한 외부 공간과 함께 공연예술, 조형예술, 그리고 자료 및 교육교환 활동의 모든 예술시설을 수용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와의 교류는 물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갈 하나의 종합문화예술센터로서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 (예술의 전당)을 창출하여 문화예술의 국민적 확산을 기하고, 예술활동을 다원적이면서 종합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예술의 전당」을 건립한다." 지침에서 제시한 계획부지면적은 약228,774㎡였고 소요공간설정은 "ⓐ공연예술 활동시설, ⓑ조형예술 활동시설, ⓒ자료 및 교육교환 활동시설, ⓓ문화예술공원"이었다.
우선, 응모작부터 살펴보자. 김수근의 안(위 모형사진)은 대지방향에 맞춘 동서방향의 수평 레이어Layer가 돋보인다. 시설배치도 이에 맞춰 가운데 스파인Spine을 두고 북쪽으로 어린이예술관-예술학교-축제극장을 두고 남쪽으로 조형예술관-음악당을 배치했다. 수평 레이어는 각각 다른 높이로 계획돼서 우면산을 배경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김수근의 계획안은 같은 해 완공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도 청량산을 등지고 대지 앞에서 두 도로가 T자로 만난다.
김중업의 안(위 모형사진)은 지붕형태를 보는 순간 그의 대표작인 프랑스대사관(1961)을 떠오르게 한다. 실제 김중업은 계획의 개념으로 "고유의 선과 디테일로써 전통양식으 재창조(조형)에 노력한다"고 밝혔다. 배치는 대지의 형태 때문에 동서축을 고려했지만 대부분의 시설은 상징광장을 가운데 두고 둘러싸고 있다.
미국업체였던 T.A.C는 남부순환로를 따라 도로에 면해 시설을 배치했다(위 모형사진). 다른 안과 유사하게 T자 교차로 부분에 광장을 두었고 광장에 면한 양쪽 건물은 원형 평면으로 풀었다. 정확한 시설명을 확인할 수 없지만 평면상 음악당과 같은 주요시설로 추정된다. 이 외 나머지 건물들은 남쪽 부분의 모서리를 45도 대각선으로 변화감을 주었다. T.A.C는 'The Architects Collaborative'의 약자로 1945년 Walter Gropius와 7명의 젊은 건축가 -Norman Fletcher, Jean Fletcher, John Harkness, Sarah Harkness, Robert McMillan, Louis McMillen, Benjamin Thompson- 들이 설립했다. 8명의 건축가들은 현재 모두 세상을 떴다. T.A.C는 1980년대에 자금난을 겪다가 최종적으로 1995년 4월 문을 닫았다.
영국업체였던 C.P.B는 'Chamberlin, Powell and Bon'의 약자로 바비칸아트센터Barbican Center를 설계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바비칸아트센터는 예술의전당의 모델이었다. C.P.B는 다른 안들과 달리 강한 축을 설정하지 않고 가운데 자연적인 능선을 살린 오픈스페이스를 둘러싼 형태로 시설을 배치했다(위 모형사진). 자연적인 곡선을 살리고자 시설의 형태도 정형적이기 보다는 유기적이다. 그리고 남쪽에 원형의 평면으로 콘서트홀과 야외극장을 설계했다. 또한, T.A.C의 안과 유사하게 남부순환로와의 관계가 적극적이다. 아마도 설계자들이 대상지를 직접 답사하지 않고 주어진 자료만을 가지고 설계를 진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김석철의 안은 외관에서 보이는 모습은 현재와 상당히 다르다. 예술의전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건 한국적 전통을 나타내는 '갓(오페라하우스)'과 '부채(음악당)'모양의 형상화다. 하지만 김석철의 원안(위 모형사진)을 보면 어디에도 두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적 모티브의 직접적인 차용으로 범위를 넓히면 팔각형 4단 지붕이 쌓여 있는 음악당 정도다. 배치는 현재와 전체적으로는 유사하다. 상징광장을 중심으로 조형예술관, 어린이예술관, 축제극장을 두고 남서쪽 대각선으로 만남의 광장과 축제광장을 전개시켰다. 세 개의 광장은 대지의 지형에 맞춰 높이차를 이룬다. 가장 높은 축제광장 주위에는 음악당, 예술자료관이 배치됐다. 시설의 확장은 축제광장 서쪽으로 생각했다. 김석철은 앞서 인용한 건립목표를 수용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현실방안으로 "①옥내의 전문 기능공간을 가진 예술의 거리-하나의 마을, ②사용자, 관리자 입장에서의 접근, ③새로운 전용공간의 실현, ④문화적 주체성의 장소화"를 제안했다.
예술의전당 건립사업은 전두환(1980.9~1988.2)과 노태우 정권시기(1988.2~1993.1)와 맞물린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건립계획은 1982년에 끝났고 현상설계는 1984년에 있었다. 착공 후 1단계로 음악당과 서예박물관 개관이 1988년 2월에 있었고 2단계 시설인 한가람 미술관과 예술자료관 개관은 1990년 10월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1993년 2월에 오페라하우스 전관이 준공됐다. 이후 1999년 11월에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이 개관했다.
어떤 프로젝트든 현상설계공모 때 제출된 안이 끝까지 유지되기는 힘들다. 더군다나 예술의전당과 같이 대규모 공공시설의 경우 각 설계 단계에서 권력자의 취향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동의가 약한 대통령이 밑도 끝도 없는 문화를 들이밀고 전통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에 진지한 고민없이 전통 물건의 형태적 차용을 요구하는 건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다. 어쩌면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든 한옥을 너무나 좋아했던, 전-노 대통령의 앞선 대통령을 추종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하던 대로 하자'는 너무나 군대적인 사고방식이라 생각한다. 임석재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신기념비주의의 영향으로 제3세계에서도 1960~80년대에 대도시 내 대형 공공건물에 유사한 경향이 크게 유행"했고 "이때 건축사조는 그 나라의 전통 양식을 차용한 지역 역사주의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예술의전당도 이런 흐름으로 추진되고 지어졌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대부분 독재정권, 특히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한 나라들에서 유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유신정권-5공화국-6공화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이런 종류의 공공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이때 내건 기치는 민족주의였고 건축 양식도 그에 따라 한국의 전통 건축을 직설적으로 모방한 처리가 주를 이루었다《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945~2000, 휴머니스트》."
물론 일반인들이 건축설계의 개념을 받아들일 때 직설적인 형태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이 쉽고 이 때문에 건축가가 이 방향으로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동의가 있어야 하는 대형 공공건축물에서는 이런 전략이 자주 사용된다. 더군다나 예술의전당은 상징적이고 긍정적인 여론 유도가 무엇보다 필요한 사업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고 한국문화예술의 국제적 연대성을 높이기 위함"- 이었다. 그래서 김석철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형태 -갓, 부채- 를 언론이 언급했다 하더라도 침묵했는지 모른다. 심지어 지금도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에서 오페라하우스는 "갓머리를 상징하는 모양의 독특한 건축형태를 자랑하는 예술의전당의 메인공간"으로 소개돼 있다.
현재 예술의전당의 전체적인 배치(부지면적 231,000㎡, 총 연면적 120,353㎡)는 김석철의 초기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개별 시설의 배치는 달라졌다. 우선 남부순환로와 반포대로가 T자로 교차하는 부분에는 한가람미술관(1990년 개관. 연면적 15,540㎡)과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1,256㎡규모의 상설전시관)이 동서에 배치됐고 그 뒤로 오페라하우스가 신세계스퀘어를 공유하고 있다(위 사진). 원안에서는 조형예술관과 어린이예술관 그리고 축제극장이 배치돼 있었다. 우면산을 배경으로 기념비적인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던 의도는 그대로 인데 그 중심 시설이 축제극장에서 오페라하우스로 바뀌었다. 다만 시설의 형태가 축제극장의 경우 테라스Terrace를 이루며 셋백Setback돼 있었는데, 오페라하우스는 갓 형태의 지붕이 얹혀졌다. 우면산을 배경으로 하는 오브제Objet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오브제를 두드러져 보이도록 하기 위해 전면에 배치된 두 매스 -한가람미술관과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 의 형태는 다분히 조용해졌다(아래 두 사진).
어떤 자료에 "오페라하우스는 한국문화의 한 핵심을 이루는 선비정신을 본뜬 갓 모양의 원형건물"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한국문화의 핵심이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것이 선비정신이 아니라 군대정신이었다면 반듯한 소위의 모자창 같은 건축을 당시 권력자들은 강요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문구에는 참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다. 왜 많은 것 중 '갓'이 선비정신을 대표해야 하는가? 갓 쓴 선비가 모두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 때에도 선비들은 갓을 쓰고 있었다. 또한 한국문화의 핵심이 정말 선비정신인가? 이 논리적이지 못한 문구는 아마도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예술의전당 건축 형태에 대한 바램인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갓을 형상화한 오페라하우스'라는 설명에 대해 김석철은 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이어지는 그의 작업에서 '원'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형이 됐다. 몇몇 건축비평가들은 김석철의 평생의 건축화두로 '원'을 언급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건축설계 뿐만 아니라 도시계획 및 도시설계 프로젝트에서도 거침없이 원을 그렸다. 원은 구심력이 강한 도형이다. 그래서 "뭔가를 하나로 엮고자 한다는 의도"나 "여기서 이 일대의 중심이다"라는 메시지Message를 전달하기를 원할 때 설계자는 원을 그린다. 김석철의 작업에서 이런 의도로 그려진 원은 북한, 중국, 러시아 3국의 접경지역에 계획한 <두만강 다국적 도시(위 조감도)>에서 정점을 이룬다.
다시 예술의전당 얘기로 돌아와 오페라하우스와 두 미술관을 동쪽에 두고 부채모양을 형상화 했다는 음악당이 남부순환도로에 면해 배치돼 있다(위 사진). 그리고 그 맞은편(남쪽)으로 사람의 얼굴을 재현했다는 서울서예박물관이 있다. 갓과 부채에 이어 이번에는 사람의 얼굴이다. 원안에서는 서예박물관 자리에 음악당이, 음악당 자리에 예술자료관이 배치돼 있었다. 연면적 19,604㎡ 규모의 음악당은 1988년 개관했고 리노베이션 공사를 통해 현재는 콘서트홀과 IBK챔버홀, 리사이틀홀로 나뉘어 있다. 음악당 로비Lobby(아래사진)는 앞서 언급했듯이 김석철의 대표적인 건축언어인 원의 연속과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석철의 당선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상징광장과 연결되는 팔각형의 보행 데크Deck다. 데크 아래를 지나는 남부순환로는 지하화 됐다. 이를 통해 김석철은 주변 도시조직에서 예술의전당으로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했다. 또한, 도시설계와 도시계획을 많이 작업했던 건축가답게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인 남부터미널역(직선거리 580m, 도보거리 750m, 위 도면)까지 연결되는 지하 쇼핑몰을 계획했다. 그리고 주변 도시화계획도 함께 제안했다. 그러나 김석철이 제안한 이런 계획 중 실현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시설 준공 10년이 지난 2004년에 예술의전당 정면에서 동쪽으로 300m정도 떨어진 곳에 아쿠아 아트Aqua Art육교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육교도 공공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서초3동 남부터미널 부지(現 현대슈퍼빌) 일부를 매입한 군인공제회가 부지의 용도를 변경해주는데 따른 공공기여 방안으로 사업비 55억을 들여 서초구에 기부채납한 시설이다. 육교의 설계는 "교통도 디자인화 하자"고 주장하는 피에르 잘리콩Pierre Jalicon이 맡았다. 솔직히 이 육교는 예술의전당으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현대슈퍼빌 거주자들이 우면산 산책 갈때 편하게 가라고 만든 것이다.
왕복10차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 뒤에 서 있는 예술의전당을 볼 때마다 "권력에 의해 한번 왜곡된 공간이 원래 자리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렵구나", "하나의 프로젝트가 태생부터 가지게 된 특성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을 위해 지어진 공공시설은 시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그 장소에 대한 기억도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공유될 때 그 장소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이 공공시설이 공공장소로서 갖는 핵심이다. 예술의전당은 이 과정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쉬운 접근성을 처음부터 가지지 못했다. 그래도 2010년부터 추진한 예술의전당 교차로의 횡단보도가 2013년에 신설되어 걸어서 가기 편해졌다. 예술의전당 내 시설들의 콘텐츠Contents가 워낙 좋다 보니 보행 접근성 향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 《운영보고서》에 따르면 예술의전당의 2013년 총 관람객 수는 2,932,968명 이었고 횡단보도가 설치되기 전인 2010년 총 관람객 수는 2,325,338명이었다. 참고로 2015년 총 관람객 수는 2,535,617명이었는데 2014년 말부터 2015년 동안 서울서예박물관은 리모델링 공사를 하느라 관람객이 없었다. 예술의전당을 갈 때마다 고립된 예술의전당을 걱정하는 김석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김석철에게 갓이나 부채를 형상화했다는 설명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팔각형 보행 데크나 역으로 이어지는 지하 쇼핑몰 그리고 주변 도시화계획 등에 담긴 주변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