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장미대선 기간 중 한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역대 대선 후보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꼽을 때 늘 등장했던 백범 김구가 이번 대선 후보에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각 후보들이 닮고 싶다고 선정한 인물은 문재인과 안철수는 세종대왕, 유승민은 정약용, 심상정은 정도전 그리고 홍준표는 박정희 였다. 해당 기사에서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김구는 뉴라이트 진영에서 비판을 받는 인물"이라며 "이번에 나선 대선 후보들이 이데올로기 갈등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김구를 존경한다고 밝힌 이들은 과거 주로 야권 인사들인데, 이번 대선에서는 안정적으로 지지표를 받고 있는 야권에서 이념적인 갈등의 여지를 남겨서 좋을 게 없는 만큼 다른 인물을 꼽는게 아니냐"는 설명이었다(대선 존경하는 인물, 민족 지도자 김구 지고 통합 리더십 세종 떴다, 세계일보, 2017.4.30).
'뉴라이트New right'는 "20세기 중·후반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보수·우익 성향 또는 반체제적 저항운동 단체나 운동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New freedom',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신우파'가 여기에 속한다. "국내에서는 2004년경부터 수구·부패 이미지로 점철된 기존 우파세력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며 뉴라이트 운동이 활성화되었"는데, "2007년 출범한 '뉴라이트 전국연합(舊 자유주의연대)'과 '뉴라이트 네트워크', '선진화정책운동' 등이 있다(네이버 시사상식사전)." 한상권 교수 비판의 근거는 김구가 1948년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통합정부 수립을 주장했다는데 있다. 김구가 반대한 남한 단독 총선거는 이승만과 미국이 원했던 정책이었다. 결국 남북한은 8월 15일과 9월 9일에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김구는 이듬해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백범 김구는 효창공원에 묻혔다. 고향은 황해도 해주 였다(1876년 8월 29일). 북한 땅이니 고향으로 돌아가 묻힐 수는 없었다. 백범이 효창공원에 묻힌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 그가 1946년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손수 봉안했기 때문이다. 그 외 안중근 의사의 가묘, 임시정부요원(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의 묘도 조성했다. 백범이 효창공원을 고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을 해보면 효창공원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장소성을 되살리고자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의사3인 중 한 명인 이봉창의 생가가 이 일대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봉창의 생가터는 효창동 118-1번지로 지금도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이봉창 생가터 비'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윤봉길은 충남 예산 생이고 백정기는 전북 정읍 생이다.
효창공원의 역사는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에서 시작된다. 정조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의빈 성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문효세자가 다섯 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이곳에 묻고 '효창원'을 조성하였다. 의빈 성씨는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연기했던 '성송연'이다. 이후 의빈 성씨도 이곳에 묻혔다. 왕가의 무덤이 있던 곳이니 일제강점기 일제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청일전쟁 직전(1894년)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대도혼성여단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은 조직적으로 훼손됐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배권을 독점했던 1924년 6월, 효창원은 133,000㎡ 규모의 '효창공원'으로 탈바꿈 됐다. 취지는 경성시민들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는 것과 같았다. '효창공원' 조성은 안타깝게도 일제가 패망하기 5개월 전인 1945년 3월 극에 달했다. 이때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가 파헤쳐져 현재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됐다.
독립운동가 및 임시정부요원의 묘 그리고 백범의 묘까지 있었으니 효창공원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컨텐츠를 지니게 됐다. 하지만 이승만과 자유당 시절 이 공간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시설들이 들어섰다. 자유당 정권은 효창공원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을 만들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은 붕괴됐지만 그들이 계획한 효창운동장은 그 해 10월 완공됐다. 효창운동장을 건설한 이유는 1959년에 서울이 제2회 아시아 축구대회 개최지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였다. 김구와 이승만의 이념이 달랐기에 이승만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박정희 정권 동안은 '조경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있었다. 그런데 사업이 진행됐다는 10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1969년 8월과 10월에는 원효대사 동상과 반공투사위령탑이 설치됐다. 1981년 6월, 전두환 정권 때 공원은 공공에 개방됐지만 유료 개방이었다. 유료로 공원을 이용한다는 개념은 지금도 일반적이지 않다. 결국 효창공원은 테니스 경기장, 놀이터 등이 있는 100% 체육시설이 됐다. 그리고 대한노인회중앙회와 대한노인회서울시연합회도 들어섰다. 땅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효창공원 내 시설들은 중구난방 이다. 1980년대 이후 '효창공원의 성역화' 여론이 일어났다. 1988년에는 '의열사'도 건립됐다.
백범 서거 직후 발족한 백범기념사업회의 숙원사업은 백범기념관 건립이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1970년,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1988년 준공된 것을 감안하면 그 때까지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지 않았다는 건 의외다. 백범기념관 건립 사업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구체화 됐다. 후보지로 경교장, 서대문형무소, 휴전선 그리고 효창공원이 거론됐는데, 당시 '효창공원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던 용산구가 효창공원 내 건립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백범 서거 50주년이 되던 1999년, '백범김구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설립됐다. 건립공사비 150억 중 100억은 국비, 50억은 국민성금으로 충당한다는 계획도 수립됐다. 그리고 기념관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가 열렸다. 우선 건립위에서 김광현 교수와 신용하 교수(서울대 사학과) 등 8인으로 구성된 건립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모, 우방건설 회장)를 별도로 조직하여 설계지침을 마련했다. 제시된 설계의 기본방향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백범사상의 건축적 해석조항'이었다. 이는 단순히 건물을 만들고 그 안에 기념할 수 있는 전시물 등을 담아내는 소극적인 차원을 떠나 하나의 기념관이 기념하고자 하는 인물의 '사상'을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구축되도록 하고자 함 이었다. 즉 기념관이 그의 삶과 정신과 합일되는 상징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의도하는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이상건축, 2000.07).
백범 기념관은 건축가들에게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 즉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을 기념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 기회였다. 2000년 4월 10일 설계경기 공모가 공고됐다. 심사위원 선정은 작품 접수가 마감된 후 이루어졌다. 현상설계 참가작은 총 23점이었다. 심사결과 당선작은 임재용&OCA건축. 그리고 우수작에 스페이스SPACE연과 김종규(한국예술종합학교) 공동작이, 가작으로는 이은식&기오헌과 정구은&삼예건축의 안이 선정됐다. 선정된 4개 회사 외에 현상에 참여했던 참가작 중에는 황일인&일건건축, 범건축, 해안건축, 박용성&시감건축과 독립기념관을 설계한 김기웅&삼정D&G도 있었다. 공정성을 위해 가장 나중에 공개된 심사위원들은 조성룡(도시건축, 심사위원장), 정진국(한양대), 최두남, 조병수, 김광현(서울대), 정영선(서안조경), 김신(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 백범의 차남)이었다.
당선작에서 기념관은 효창공원 방향으로 ㅁ자정방형 평면이었다. 매스Mass는 각 모서리에 설치된 하나의 기둥으로만 지지되는 형태였다. 설계자는 트러스Truss구조를 제안했다. 이런 구조를 고려했을 때 입면재료로 계획된 화강석버너구이는 무거웠다. 물론 기념관이라는 프로그램을 드러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임재용은 "능이 육신을 담고, 기념관이 정심을 담고 있다는 상징적인 관계에서 시작하였다. 백범 선생의 강한 의지와 애국심, 한편으로 평범하면서 소박한 다소 상반된 이미지를 명료하면서 단순한 형태로 풀었다. 주변의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도 단순한 매스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혼돈스런 주변의 환경과 달리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첫 대면하는 지하층의 비어있는 안마당, 지하1층, 지상1,2층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동선을 유도하여 백범 선생의 일생을 따라가며 외부의 묘로 이끌어 참배하는 동선으로 이어지게 한 것과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우리 전통건축의 묘미를 은유적으로 적용하였다."고 설명했다(설계경기 2000.08). 전체적으로 당선작은 '백범白凡'이라는 김구의 호 만큼이나 검박했다. 시상식에서 김신은 "구조적으로 불안해 보이므로 기둥 여러개로 기념관을 떠받들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심사위원장인 조성룡은 "발주처 입장에서 최대한 요구하되 건축가에게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지 말길 바란다"며 건축가의 위상을 강조했다《설계경기, 2000.08》.
2002년 10월 21일 개관식이 열렸다. 그런데 완공된 백범기념관에서 당선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백범기념관의 정면에는 입구 양쪽으로 6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다. 이 기둥들이 앞서 인용한 김신이 생각한 기둥의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을 쓴 이용재는 자신의 블로그에 효창공원에 안치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을 상징하는 전면 6개의 기둥이 김구를 떠받친다는 해석이라고 썼다.
개관후 유일하게 관련 기사를 실은 《이상건축, 2002.11》에는 "인습적인 거대주의와 과시적 조형 의지로 점철되어버린 기념관, 과도한 형태와 파사드가 강조된 채 우리의 도시건축과 아무런 역사적, 장소적 관계성을 갖지 못하는, 그것도 독립된 국가의 문지기가 되겠다던 백범의 사상과도 무관하게 '권위'만을 강조한 형태로 기념관이 지어져 있었다. 더욱이 원래 현상공모를 통해 당선된 안이 변질된 채로 말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지어진 이유에 대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관여하는 '한 역사학자'의 집요한 요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역사계에서 잘 알려진 이 학자는 '원래의 설계안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김구 선생의 기념관인데...'라며, 권위적인 구성이나 파사드 중심의 정면성과 서양 고전건축의 오더Order를 연상시키는 기둥의 도입 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고 한다. "당연히 건축가는 반발을 했지만 사업협회도 좌지우지하던 한 사람의 억지(?)와 오만한 권력(?)은 결국 안이 바뀌게 만들었다"는 것이다(Photo Report : 백범 김구는 권위주의의 상징인가?, 이상건축 2002.11).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을 스스로 설명했다. "'白凡'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내 원을 표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 만큼이나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백범일지, 돌베개》."현재 백범기념관은 '白凡(백정과 범부)'이 아닌 '王聖(왕과 성인)' 김구를 위한 기념관 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평범함 이하의 미천한 시민이고자 했다. 다만 그 대한민국이 독립된 대한민국이길 바랬다. 그는 역사와 국민이 자신을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평범한 누군가'로 봐주길 원했다. 그런데 후에 그를 기리는 집단은 그를 '백범'이 아닌 '왕성', 특별한 누군가로 만들었다. 분명 그렇게 만들라 백범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를 기리는 집단이 그걸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 특별한 사람을 모시라는 권위가 그를 기념하는 공간에 필요했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백범은 원하지 않은- 현재 기념관은 150억짜리 돌무더기가 됐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장 잘 보이는 벽(위 사진)에 백범이 한 얘기 중 가장 와닿는, 그래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글이 적혀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최소한 백범의 기념관은 그가 염원한 '높은 문화의 힘'을 보여줬어야 했다. 백범기념관 안내판에는 "근현대사 전문 역사박물관인 백범기념관은 격동의 한국근현대사와 함께 한 백범 김구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온 겨례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다"고 적혀 앴다. 이 돌무더기가 '온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란다. 난 그런 문화 공유하고 싶지 않다.
백범기념관이 완공되고 효창공원에 대한 현상설계가 몇 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효창근린공원 선열묘역 주변 정비사업 실시설계용역, 2004.3.9>과 <효창공원 독립공원화 조성사업 설계용역(현상공모), 2005.12.21>이다. <효창공원 독립공원화 조성사업 설계용역> 선정자는 원도시건축(위 조감도)이었다. 당선안은 현재까지 실행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실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계안이 맘에 들지 않아서 라기 보다는 어떤 안이 됐든 백범기념관이 지금 보다 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 백범을 기념하는 공간이 지금 보다 더 잘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바램. 현재 백범기념관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