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리옹Lyon의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 참사회는 롱샹Ronchamp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로 르 꼬르뷔제Le Corbusier를 선임했다. 당시 이 결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꾸뛰리에Maire-Alain Couturier(1897~1954, 위 사진에서 왼쪽) 신부였다. 1년 후인 1953년 꾸뛰리에 신부는 르 꼬르뷔제에게 수도원 설계를 의뢰했다. 위치는 리옹에서 30km 떨어진 아르브렐Eveux sur L'Arbresle이었다.
도미니크회 교구 참사회가 르 꼬르뷔제에게 요구했던 사항은 건축에서 중세 건물의 엄격함이 묻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꾸뛰리에 신부는 "성당의 천정은 평평해야 하고 사면은 모두 벽으로 둘러 싸여 있어야 하며, 내부에는 빛이 떠다닐 수 있는 적당한 비율의 기둥을 세워야 한다"는 견해를 전달했다. 신부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신성한 존경심 이 절로 우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5년 롱샹성당이 봉헌되고 1년이 지난 1956년 라뚜렛 수도원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4년 뒤인 1960년 10월 19일 수도원은 준공됐다. 올해는 라뚜렛 수도원이 준공된지 57년이 되는 해다. 라뚜렛 수도원은 르 꼬르뷔제 작품을 통틀어 모든 디테일에 표현력과 광범위한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라뚜렛 수도원은 서쪽으로 경사진 언덕에 중세 시대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ㅁ자 평면으로 설계됐다. 특이한 형태를 지닌 롱샹 성당 다음에 설계된 건축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라뚜렛 수도원은 정직하고 이성적이다. 심지어 승효상은 르 꼬르뷔제가 라뚜렛 수도원을 통해 고전으로 돌아갔다고 믿었다. 승효상은 "르 꼬르뷔제의 천재적 본능을 다시 죽이고 고전 앞에 겸손하여 얻은 극기의 산물"로 라뚜렛 수도원을 봤다
동서남북 4개의 직사각형이 둘러싼 안뜰은 쿼드Quadrangle다. 이 중 북쪽 매스에 배치된 예배당은 수도사들의 영적영역으로서의 공공공간이다. 다른 매스에는 수도사들의 생활에 필요한 숙소, 식당과 주방, 도서실, 휴게실 등 100여개 공간이 배치돼 있다. 두 영역은 외관상 뚜렷이 구분되는데, 예배당이 있는 북쪽 매스는 거칠게 마감된 노출콘크리트 외벽에 창이 없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예배당의 외관은 수도사와 방문객들에게 은둔의 삶과 사색을 요구한다.
반면, 다른 매스의 입면에는 모듈러가 적용 된 창이 뚫려 있고 개인영역인 상부 두 개 층에는 브리이즈-솔레일Brise-soleils이 설치돼 있다. 이 매스에 있는 수사들의 방은 주거 공간으로서는 상당히 불편하다(위 사진). 사람과 공간의 비례에 각별히 신경을 썼던 르 꼬르뷔제의 설계답지(?) 않다. 이 또한 은둔의 삶과 사색을 요구하는 수도 생활을 상징한다.
쿼드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작은 채플Chapel과 계단실 그리고 연결통로로 이루어져 있다(위 사진). 수도원의 평면은 중세 수도원과 유사하지만 건물이 앉혀진 대지는 서쪽으로 경사져 있어 건물은 필로티Piloti로 들려져 있다. 그래서 마치 언젠가 떠날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 같다. 필로티 외에도 르 꼬르뷔제 주장한 '새로운 건축의 5형식'은 라뚜렛 수도원에 적용돼 있다.
꾸뛰리에 신부의 요구사항이 가장 잘 반영된 예배당은 건조하다. 그 건조함에 사람들을 마르지 않게 하는 요소는 '빛'이다. 수도원 예배당 내부에서 빛은 남쪽으로 만들어진 7개의 천창, 남북 쪽의 수평 띠창, 동쪽 입구의 수직 띠창을 통해 각각 스며든다. 그 중에서도 북쪽에 만들어진 세 개의 빛의 캐논Light-Cannon이 가장 압도적이다.
제한적인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 만으로도 충분하려면 내부는 더 어두워야 한다. 빛의 효과는 어둠이 있기에 가능하고 또 그 어둠의 깊이가 깊을수록 효과는 배가 된다. 더군다나 라뚜렛 수도원 예배당은 규모도 크고 높이도 높아서 공간을 깊게 만들수록 빛을 통한 스펙터클은 극대화 된다.
사람들은 빛을 신의 현현懸懸이라 믿었다. 이 믿음의 가장 큰 근거는 성서에 있다. 창세기 1장 3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메 빛이 있었고"라는 문구가 있고 요한복음 1장 1~5절에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라고 적혀있다.
기독교 이전으로 올라가 보면 그리스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가 "모든 것의 창조자는 ... 빛이오"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후세에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문맹률이 높았던 중세시대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창에 끼워진 스테인드 글라스는 신자들에게 신을 교육시키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 수단에 아우라를 입히는 빛은 신이어야 했다. 종교시설을 설계하는 대부분의 설계자들은 사람들이 빛을 통해 그 공간에서 신을 느끼기를 원한다. 르 꼬르뷔제도 라뚜렛 수도원과 롱샹 성당에서 이 믿음을 따랐다.
개인적으로 라뚜렛 수도원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예배당의 북쪽 수평띠창과 수도원의 서쪽 매스로 접근하는 문이 만나 이루는 '빛나는 십자가'였다(위&아래사진). 수도원을 처음 갔을 때 가이드의 설명으로 처음 알게 됐다. 참고로 이 십자가는 수도원 준공 당시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르 꼬르뷔제가 설계하지 않은 요소는 아니었다. 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아래 니콜라스 판의 글을 참고하자.
"육중하고 단단한 구리 문은 성당의 정식 입구다. 이 문은 1985년에야 비로소 설치되었는데,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수도원이 완공된 지 몇 년이 지나 이곳을 방문한 건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르 꼬르뷔제가 처음 설계한 조감도에서 성당 입구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십자가가 어디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Italy의 건축가들이 마침내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들은 처음 설계도에 따라, 성당 입구에 회전식을 여닫는 구리 문을 추가로 설치했다. 그 회전문이 문틀과 수직이 되는 순간에, 숨겨져 있던 십자가가 늠름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성당 북쪽 벽에 빛이 들어오도록 만든 가로로 기다란 환기창이 있었는데, 입구의 구리 문이 완전히 열려 그 환기창과 정확하게 수직을 이루게 되자, 르 꼬르뷔제가 숨겨둔 십자가가 나타난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언덕 위 수도원, 니콜라스 판Nicholas Phan, 컬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