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Renaissance(14~16C)기 유독 많은 천재들이 등장했다. 인류의 지능 지수가 갑자기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더 많은 제안들이 일어나고 더 많은 제안들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르네상스 시기에 등장한 천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a Vinci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일 듯 하다.
두 사람 중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다빈치였다.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이었던 빈치Vinci에서 태어났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역시 피렌체 공화국이었던 아레초Arezzo 인근 카프레제Caprese에서 태어났다. 태어남을 얘기했으니 죽음도 언급해 보면, 다빈치는 67세(1519년 5월 2일)에 프랑스 왕국이었던 앙브와즈Amboise에서 죽었다. 미켈란젤로는 88세(1564년 2월 18일)에 로마에서 세상을 떴다. 미켈란젤로의 시신은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Santa Croce 성당으로 옮겨와 안치됐다(위 사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미켈라젤로의 작업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성 베드로 성당St. Peter's Basilica에 있는 피에타Pieta(위 사진)나 시스틴 예배당의 천장화Sistine Chapel ceiling(아래사진) 아니면 피렌체에 있는 데비드상The Statue of David일 듯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마 캄피톨 광장이 가장 좋았다. 아마도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 같다.
캄피톨 광장 작업은 그가 로마에 머물렀던 1534년~1546년에 진행됐다. 이 시기에 그는 시스틴 예배당 재단벽의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1534~1541)', 팔라초 파르네세Palazzo Farnese의 상층부 설계, 산타마리아 데글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의 인테리어Interior, 바실리카 디 산타마리아 마조레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등의 작업을 했다.
캄피톨 광장은 로마를 구성하는 7개의 언덕 중 하나인 캄피톨 언덕 정상에 있다(위 구글 위성사진). 고대 로마 정치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북서쪽에 있는 캄피톨 언덕에는 BC 600년경 만들어진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신전은 황제조차 죽으면 신으로 모셨던 다신교 국가 로마제국에서도 최상급 대우를 받은 세 명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에 모셔진 신을 '카피톨리움 3神Capitoline Triad'이라 불렀다. 아마도 오랫동안 캄피톨 언덕 위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포로 로마노와 연계돼 있었다.
BC 1C에는 현재 '기록보관소'라 할 수 있는 타불라륨Tabularium이 지어졌다. 로마 뿐만 아니라 유럽사회가 기독교 하나를 믿는 사회로 바뀌면서 언덕 위에 있었던 신전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공고히 됐던 중세시대에는 지형적으로 높다는 대지의 상황은 신전보다 요새나 공공청사 건립 부지로 더 적합하다고 간주됐다. 이후 언덕 주변에는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Palazzo dei Conservatori(남서), 팔라초 세나토리오Palazzo Senatorio(남동), 산타마리아 인 아라코엘리Santa Maria in Aracoeli(북동)가 불규칙한 형태로 각각의 내부적인 필요에 의해 놓여졌다. '놓여졌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세 건물 사이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36년 교황 바울3세PaulⅢ는 새로운 로마의 상징을 만들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광장 설계를 의뢰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이런 바램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에 기존 포로 로마노와 관계돼 있던 광장을 교황이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방향으로 열었다 이를 통해 광장과 성 베드로 성당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축은 존재하지 않지만 광장과 성당이 연결돼 있다는 관계를 갖게 됐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성 베드로 성당을 향한 축을 중심으로 광장을 재구성했다. 그의 작업은 1546년까지 지속됐다.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시작할 때를 기준으로 광장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건물은 중세시대 지방행정 용으로 지어진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였다. 광장 남서쪽에 있는 이 건물은 BC 6C에 지어진 주피터Jupiter신전 위에 지어졌다. 이후 13C~14C에 현재 광장 정면을 구성하는 팔라초 세나토리오(광장 남동쪽, 위&아래사진)가 타불라륨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그리고 광장의 북서쪽에는 산타마리아 인 아라코엘리가 있었는데, 이 성당은 광장과 연계돼 있다기 보다는 현재 비토리오 엠마누엘2세 기념관Monument to Vittorio EmanueleⅡ이 있는 북쪽으로 더 치우쳐져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언덕 위에 있던 기존 세 건물이 이루고 있는 불규칙적인 조합을 정리하고 기존 광장과 팔라초에 놓여 있던 조각상들을 비롯한 건축적 장치들을 재배치하여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르네상스 사상에 걸맞는 공간으로 재조정했다. 우선 그는 광장의 정면을 팔라초 세나토리오(위 사진)로 설정하고 건물 전면에 대칭적으로 계단을 설계했다. 그리고 계단 아래 분수 양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두 조각상을 놓았는데, 이 두 조각상은 티베르Tiber강과 나일Nile강의 신을 상징한다. 다분히 대칭성을 강조한 듯한 배치에 쓰인 이 두 조각상은 최초 팔라초 콘세르바토리 앞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광장과 광장 전면을 구성하게 될 팔라초 세나토리오의 역할을 충분히 고려했다.
팔라초 세나토리오의 중심성을 강조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종탑의 위치도 팔라초 한가운데로 바꿨다(위 사진). 현재 종탑의 위치가 그렇게 특이해 보이지 않지만 유럽 내 다른 팔라초에 세워진 종탑의 위치를 감안하면 건물 한가운데 세워진 종탑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종탑의 실질적인 디자인은 1578년~1582년에 마르티노 롱기Martino Longhi the Eler가 했다. 캄피톨 광장의 얼굴격인 팔라초 세나토리오의 파사드Facade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와 지롤라모 라이날디Girolamo Rainaldi가 디자인 했다. 하지만 7베이Bay에 만들어진 사각형 창문의 상인방에 둥근 아치Arch와 페디먼트Pediment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경직된 대칭성을 최대한 피하려 한 파사드의 규준은 미켈란젤로가 제시했다.
미켈란젤로는 광장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의 새로운 파사드를 부가했다. 팔라초 세나토리오와 같은 7베이로 구성된 새로운 파사드는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들과 공공공간들이 그렇듯 도시적 스케일Scale과 건축적 대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사드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2층 높이의 코린트 양식Corinthian 의 벽기둥Pilaster이다. 이 벽기둥은 광장 정면에 있는 팔라초 세나토리오 파사드에 -비록 1개층 높이지만- 기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같은 양식의 벽기둥에 대응한다.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 맞은편에 있는 팔라초 누오보Palazzo Nuovo(1603년~1654년)의 파사드가 같은 양식으로 처리돼 있음을 고려하면 결국 광장은 2개층 높이의 코린트 양식의 벽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존 서머슨John Summerson은 "이것이야말로 미켈란젤로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자유를 불러일으키는 창의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코린트 양식의 벽기둥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의 파사드에서 주 오더Main Order라면 1층에 이오닉 양식 기둥들과 2층 창문 양쪽에 아치를 받치고 있는 듯한 벽기둥은 부차적인 오더Sub Order다. 동시에 각 층에 배치된 기둥들은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의 파사드에 대응하는 건축적 장치이며, 주 오더와 조합되어 광장 좌우를 한정하는 입면에 리듬감과 변화를 만들어 낸다. 역시 존 서머슨은 "주 오더는 크게 광장의 질서에 대응하고, 부차적 오더는 각 층에 선 우리들에 대응한다. 도시적 공간과 한 명의 인간이라는 두 종류의 스케일에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고 평했다《건축의 고전적 언어, 태림문화사》.
팔라조 데이 콘세르바토리 맞은편, 광장 북동쪽에는 광장을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마지막 건물인 팔라초 누오보가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의 완공이 광장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다리꼴 평면을 만들어내는 세 팔라초와 광장 한가운데 놓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의 기마상을 통합해 내는 바닥 페이브먼트Pavement(위 사진)는 20C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명령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광장으로 오를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광장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북서쪽에 만들어진 경사로 형태의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미켈란젤로가 말을 타고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고안했다는 이 계단은 '코르도나타Cordonata'라 불린다(위 사진). 코르도나타에 대한 분석은 임석재의 글로 대체한다.
"이 속에 담긴 뜻은 '편안함'과 '근원성' 두 가지다. 로마 건국의 신화가 서려 있는 '국민광장'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체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편안한 기울기를 택했다. ...(중략)... 근원성은 계단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형식을 사용했다는 뜻으로 로마 건축에 잘 어울리는 개념이다. ...(중략)...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시기는 매너리즘Mannerism의 시대였기 때문에 동시대의 유행도 무시할 수 없었다. ...(중략)... (진입계단과 광장의 사다리꼴 형태) 모두 안쪽 변이 넓은 사다리꼴, 즉 깔때기 형태이다. 쉽게 얘기해서 좌우 벽이 평행이 아니라는 뜻인데, 동선 공간을 이렇게 처리하면 투시도 왜곡효과가 일어난다. 오름의 진입방향에서 보면 속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도로 실제 속도보다 느리게 느끼게 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편안함을 유발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이기도 하다."
-계단, 문명을 오르다: 고대~르네상스, 임석재, 휴머니스트-
이 특이한 형태의 계단에서 광장을 올려다 보면 한가운데 종탑을 중심으로 강한 대칭성이 느껴진다. 광장에 다다르면 광장 한가운데 놓여진 기마상을 볼 수 있는데 기마상의 주인공은 로마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동상 자체는 고대시대 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시기는 중세시대 였다. 미켈란젤로는 기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아주 겸손한 기단을 추가했다. 얼핏 생각하면 기마상의 기단이 광장 주변 팔라초의 1개층 높이는 돼야할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추측해보자면 미켈란젤로는 광장이 높이 3.5m의 기마상에 압도되지 않기를 원했던 것 같다.
기마상과 관련하여 겸손한 기단 만큼 흥미로운 사실은 기마상의 주인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임기간 동안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Ⅰ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그 이전 황제들을 기념했던 조상들과 동상들은 과거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이유를 포함해 여러 이유로 사라졌다. 특히 청동상은 재활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기념물 제작을 위해 녹여졌다. 실제로 이 청동상이 기독교 공인 이전의 로마황제들의 청동상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동상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유는 청동상이 이곳으로 옮겨지기 전에 있었던 장소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바실리카Basilica of St. John Lateran가 있는 라테란 궁전Lateran Palace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그리스도에게 봉헌된 성당에서 기념할 일은 없을테니 아마도 옛날 사람들은 이 기마상의 주인공을 황제가 아닌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알았던 것 같다.
에드먼드 베이컨은 미켈란젤로의 캄피톨 광장 작업의 가장 위대한 속성을 '땅의 조정the modulation of the land'으로 봤다. 도시 공간 차원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의미는 '그려진 공간'의 등장, '만들어진 공간'의 조성이다. 미켈란젤로의 캄피톨 광장 작업도 그려지고 만들어진 공간이다. 더군다나 캄피톨 광장은 어떤 맥락Context도 없는 빈 땅이 아니라 꽉 짜여진 맥락 속에서 만들어낸 잘 조절되고 잘 조합된 도시공간이다. 현재 캄피톨 광장 내에 모든 요소들은 어떤 한 요소도 흩트리면 안될 것 같은 꽉찬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크프리트 기디온Sigfried Giedion에 따르면 캄피톨 광장을 연구한 프랑스 사람들은 '축의 예찬'이라 불렀고 이 디자인이 18세기 도시계획의 구성 원리가 됐다고 한다《Space, Time and Architecture, HavardUniv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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