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처음 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게티 센터Getty Center였다. 이유는 당시 들고 다닌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에서 소개한 '21세기 아크로폴리스21C Acropolis'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게티 센터 방문 이후 이 건물의 평면을 수없이 참고했고 리차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그가 설계한 다른 공간들을 사랑하게 됐다.
게티 센터는 1976년 타계한 석유 재벌 폴 게티J.Paul Getty의 수집품과 그가 재단에 내놓은 기부금(대략 7억불)을 바탕으로 건립됐다. 1983년 게티 재단Getty Trust은 새로움 게티 뮤지엄 건립을 위한 대지를 250만불에 구입할 것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4년 뮤지엄을 비롯한 복합시설 설계를 리차드 마이어에게 맡겼다.
공사는 1989년에 시작됐다. 결국 설계기간이 5년 정도 걸린 셈이다. 그리고 공사 지연으로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늦은 1997년 12월 16일 개관했다. 프로젝트 시작후 14년 만이었다. 올해는 게티센터 개관 20주년이 되는 해다. 투입 공사비도 당초 350만불을 훨씬 넘는 1억 3천만불이 투입됐다. 프로젝트 기간 14년 동안 리차드 마이어는 무수한 설계변경을 해야 했다. 이는 게티 센터가 그의 최절정기 작품이라고 평가되지만 결국 프리츠커 수상(1984년) 이후 전개된 마이어의 건축언어 전반이 게티센터를 통해 표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리차드 마이어의 건축언어를 임석재의 글을 통해 정리해 보면, "마이어의 건축은 르 꼬르뷔제의 건축 모델을 차용하는 단계와 이것에 대한 조형 조작을 통해 자신만의 건축 모델을 창출해내는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마이어의 건물에서는 기둥과 벽,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빈 공간 부분과 그 속을 가로지르는 물리적 실체부(계단, 경사로, 복도, 실내발코니 등), 건물 본체외 이것을 싸는 가벽, 투명체와 불투명체, 직선과 곡선 등과 같은 여러 쌍 개념들에 의해 복합 공간에 대한 기본적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다음 단계로 이러한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마이어는 육면체를 구성하는 점, 선, 면, 입체의 기하요소에 대해 분리, 분해, 삽입, 격자 만들기 등과 같은 조형조작 기법을 최대한 적용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조형 전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마이어의 건물에서는 여러 겹의 공간 영역이 형성되면서 이 영역들 사이에 중첩, 상호관입, 충돌, 콜라주적 혼성 등과 같은 복합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빛이 더해지면서 실내 공간에는 차분하면서도 현란한 복합공간이 나타나고 있다. 이때 마이어의 대표적인 백색은 이러한 실내분위기를 더욱 배가시켜준다《미니멀리즘과 상대주의 공간, 임석재, 시공사》.
리차드 마이어는 전체 대지면적 3,000,000㎡ 중 게티 센터의 몇 개 시설이 앉혀질 1,213,000㎡에 적용할 질서를 찾아야 했다. 그는 대지 내에 있는 산타모니카 산맥의 두 봉우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11시-5시 방향으로 놓인 두 봉우리를 연결하는 축을 '자연'의 특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쌍 개념을 적용해 '도시'의 개념을 대지에서 가까운 샌디에고 프리웨이San Diego Freeway에서 찾았다. 이 축은 대략 10시-4시 방향이었는데 그래서 자연의 축과 도시의 축은 22.5도 정도 어긋나 있다.
게티 센터에서 이 두 축은 남북으로 배치된 전체 질서를 이룬다(위 위성사진). 두 축을 통해 마이어는 LA의 주요 경관요소 중 자연에 해당되는 태평양과 산 가브리엘 산San Gabriel Mountain 그리고 도시에 해당되는 LA를 대표하는 거대한 그리드 패턴Grid Pattern과 외곽으로 퍼져가는 교외지역을 게티 센터 내에서 조화시키고자 했다. 게티 센터 이후 마이어가 설계한 건축물의 평면을 보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낸 질서가 건축물을 넘어 도시차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게티 센터 전에 설계한 건물들에서는 이런 강한 질서가 읽히지 않는다. 아마도 1984년부터 14년간 게티 센터를 설계하면서 마이어는 대규모 시설의 질서를 평면을 통해 잡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게티 센터의 질서가 시작되는 자연의 축과 도시의 축을 따라가 보자. 우선 자연의 축은 앞서 언급했듯이 산타모니카 산맥의 두 봉우리를 이으면서 만들어졌다. 게티 센터 내에서 이 축의 시작점은 가장 북쪽에 있는 원형의 헬리패드Helipad다. 헬리패드에서 남쪽으로, 오디토리움Auditorium(서쪽, 아래사진)과 북관North Building 및 동관East Building(동쪽) 사이에 축의 방향성을 따라 일직선으로 워크웨이Walkway가 쭉 뻗어 있다. 그리고 선형의 녹지대와 가이드 레일Guide rail을 통해 방향성은 강조돼 있다.
이 축은 정확하게 뮤지엄 현관Museum Entrance Hall의 로툰다Rotunda에서 끝난다(위 사진). 그러나 일직선의 축이 끝날 뿐 축에 의해 만들어지는 질서는 계속된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마이어는 전시 파빌리온Exhibitions Pavillion과 웨스트 파빌리온West Pavillion의 매스Mass를 축 방향에 맞췄다. 자연의 축은 뮤지엄 클러스터Museum Cluster 보다 그 서쪽에 있는 게티 연구소Getty Research Institute(이하 GRI, 아래사진)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GRI는 한 방향성을 갖기 힘든 원형 평면이지만 마이어는 자연의 축 방향에 맞춰 가벽을 설치하고 매스 일부를 잘라냈다.
뮤지엄 현관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뮤지엄 클러스터 배치의 질서는 자연의 축과 22.5도 틀어진 도시의 축이 만들었다. 이 축은 정확하게 자연의 축이 끝나는 뮤지엄 현관의 로툰다에서 시작된다. 마이어는 도시의 축 방향성을 강조하기 위해 클러스터 내 중정의 나무를 축 방향에 맞춰 열식했다. 그리고 자연의 축 시작점에 긴 워크웨이에 연결된 원형 헬리패드를 두었듯이 도시의 축 끝점에 긴 경사로에 연결된 선인장 정원Cactus Garden을 만들었다(아래사진).
두 축의 확대는 축의 성격에 맞는 기하학으로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자연의 축은 자연의 곡선으로, 도시의 축은 도시의 그리드 패턴으로 확대된다. 자연의 축이 시작되는 헬리패드와 자연의 축이 끝나고 도시의 축이 시작되는 뮤지엄 현관의 로툰다 그리고 여기서 끝난 자연의 축이 서쪽으로 이동해 다시 시작되는 GRI의 한 가운데 광장은 모두 직경 20m의 원형이다. 남쪽 도시의 축이 끝나는 선인장 정원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부 원형이다. 또한 GRI와 그 남동쪽에 있는 센트럴 가든Central Garden(아래사진)도 게티 센터내 대부분과는 확연히 다른 직경 70m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게티 센터 평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전체적으로 그리드Grid가 만들어내는 질서 속에서 원형과 곡선의 변화가 나름의 논리로 잘 조합돼 있다. 그리고 그 선 하나하나에서 트레싱 종이Tracing Paper를 깔아놓고 설계를 하고 있는 마이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표적인 공간이 뮤지엄 클러스터다. 이곳은 총 7개 동 -시계방향으로 뮤지엄 현관→노스 파빌리온North Pavilion→패밀리 룸Family Room→이스트 파빌리온East Pavilion→사우스 파빌리온South Pavilion→웨스트 파빌리온West Pavilion→전시 파빌리온Exhibitions Pavilion- 이 남북으로 긴 중정을 둘러싸고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건물은 북쪽에 있는 뮤지엄 현관이다. 뮤지엄 현관은 일명 '그랜드 피아노 곡선', '콩팥 커브'로 불리는 곡선으로 설계돼 있다. 이 곡선은 그리드를 조금 부드럽게 처리함으로서 시선이 유연하게 흐르도록 하고 직각의 다른 매스에 비해 더 도드라지게 한다. 즉, 그리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변형된 형태의 선이다(위 사진).
뮤지엄 현관 내부에는 로툰다 한 가운데 놓여진 작은 기마상과 시각적으로 강렬한 조형미를 뽑내는 계단(위 사진)이 있다. 언급했듯이 뮤지엄 현관의 로툰다는 '자연의 축'과 '도시의 축'이 꺾이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한 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조형성 강한 계단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여기에 머물렀던 관람객들의 시선은 마이어 스스로가 'Breathing Space'로 정의한 뮤지엄 클러스터 내부 중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입동선보다 왼쪽으로 22.5도 꺾인 시각축, 두 축이 어긋난 상태가 보인다.
게티센터의 한해 방문객은 115만명 정도라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2016년 관람인원이 117만 정도였다. 게티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양질의 전시품들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게티센터를 찾는 가장 큰 이유겠지만 LA의 '자연'과 끝없이 뻗어있는 LA의 '도시'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설계를 시작하기 전 마이어도 부지를 둘러보고 "경관이 화려한 이곳은 건축가에게 건축과 자연, 지형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나는 저 풍경에서 우아하고 영원하며, 고요하고 이상적인 고전적 구조,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조가 거친 언덕위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본다'라고 예찬했다.
외부공간 설계를 담당한 로버트 어윈Robert Irwin과 로리올린Laurie Olin도 '자연'과 '도시'라는 개념을 일관적으로 유지했다. 1992년에 12,450㎡ 규모의 센트럴 가든 설계에 착수한 로버트 어윈이 설정한 디자인 개념은 'Always changing, never twice the same'이었다. 그리고 로리올린은 뮤지엄 클러스터 내부 중정 조경설계에서 마이어가 설정한 축의 방향성을 살리기 위해 열식으로 축을 표현했다. 또한, 도시의 축이 끝나는 선인장 정원에 골든 원통선인장Golden Barrel Cactus, 컬럼 선인장Column Cactus, 용설란 등을 심어 사막 조경을 재현하여 도시화 이전 상태를 연상시키도록 했다.